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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2.26 취업 성공의 지름길은? ...
- 2007.02.26 ...
- 2007.02.13 [부평삼변과 가족사 6]...
- 2007.02.11 등 4권의 동화...
- 2007.02.10 ...
- 2007.02.10 ... 2
- 2007.02.03 ...
- 2007.02.03 [부평삼변과 가족사 5]...
- 2007.01.30 ...
2007. 3. 16. 20:01
프랜차이즈산업박람회...
2007. 3. 16. 20:01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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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7회째를 맞이한 프랜차이즈산업박람회가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열리고 있다. 프랜차이즈는 흔히 체인점으로 불리며 본부에 가맹비를 납부하고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업형태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프랜차이즈 산업 중 외식업 비율이 50%에 달하는 등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번 박람회 역시 이 같은 현황을 반영하듯 외식업체들이 대거 참여해 관람객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했다. 16일 찾은 박람회장은 흡사 거대한 시식회장을 방불케 했다. 입구까지 음식냄새가 번져 나왔고 가스버너 위에서 요리들이 지글거리며 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박람회에서는 피자서부터 치킨, 냉면, 꼬치,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젓갈, 김치 등 밑반찬까지 시식용으로 선보였다. 심지어 막걸리, 맥주 등 알코올음료 시음도 가능했고 식후 입 냄새를 없애는 필름타입의 디저트 등 아이디어 상품도 선보이며 일반 음식들과 자웅을 겨뤘다. 눈에 띄었던 것은 관람객들의 동선이다. 관람객은 철저하게 시식코너를 중심으로 이동했다. 피자, 치킨, 아이스크림 등 인기 시식코너는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고 기다리는 등 장사진을 이룬 반면 내 놓을만한 것이 없는 매체, 창업컨설팅 업체 등 부스는 썰렁했다. 시식 유무에 따라 관람객 쏠림 현상이 심했다. 시식행사 유무에 따라 관람객 쏠림 현상
관람객 최용준씨(47)는 "창업준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박람회에 왔다"며 "정보도 얻고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맛봐서 즐겁다"고 말했다. 시식행사는 외식 프랜차이즈가 자사의 맛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자리로 박람회를 활기차게 하고 있다. 시식행사 없이 가맹점주를 모집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 설명이다. 이에 따라 현장에서 시식행사를 열지 못한 일부 업체들은 별도로 사업설명회를 갖는 등 가맹점 모으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물퓨전 요리주점 <조치조치>가 오는 19일부터 3일간 회사에서 사업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원할머니보쌈으로 유명한 <원앤원> 역시 매월 창업설명회를 열고 있다. 프랜차이즈의 존립기반은 가맹점 확산에 있다. 가맹점 가입을 통해서 가입비, 인테리어, 물품 공급, 교육 등을 통해 본부의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람회는 가맹점 늘리기를 위한 치열한 홍보장이 된다. 시식 코너도 같은 맥락에서 운영된다. <원앤원> 마케팅팀 이종구 과장은 "박람회는 브랜드 유지와 확산이란 차원에서 지난 2004년부터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면서 "적어도 3년 정도 꾸준히 이름을 알려야 가맹자가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가맹점 모집을 했다가 금방 망하는 회사가 있기 때문에 3년 정도의 업력이 있는 업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3년은 브랜드 알려야 가맹자 늘어"
이번 박람회는 이름에 걸맞게 프랜차이즈산업과 관련된 다양한 제품들이 선보였다. 외식업체를 비롯해 각종 배달용 오토바이, 컴퓨터 주변 기기는 물론 인테리어업체, 편의점 사업체까지 모두 127개의 업체가 참가했다. 한편 산자부가 실시한 프랜차이즈산업 실태조사(2005)에 따르면 전체 가맹본부는 2211개이고 이중 외식업이 1194개로 전체 54%, 소매업 515개(23.3%), 서비스업 502개(22.7%)로 나타났다. 가맹점 수로는 외식업이 14만여 곳(50%), 소매업 8만7500곳, 서비스업 5만4700곳에 달했다. 이들 중 외식업 성장비율이 다른 업종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FC창업코리아 강병오 대표는 "외식업은 '먹는 장사가 남는 장사'라는 속설에 따라 장기불황 속에서도 큰 폭으로 성장했다"며 "IMF 이후 양적 팽창 시기였다면 앞으로 10년 동안은 질적 성숙이 필요한 시기"라고 조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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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26. 11:41
취업 성공의 지름길은? ...
2007. 2. 26. 11:41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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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예비 사회인이 대거 배출되는 대학 졸업 시즌이다. 그러나 졸업의 기쁨도 잠시. 그들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취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재정경제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대학졸업생은 30만명. 올해도 이와 비슷한 규모다. 문제는 이들 졸업생들만큼의 기존 취업준비생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취업 준비생은 29만9000명 규모. 올해의 취업경쟁률은 2배로 껑충 뛰는 셈이다. 게다가 매년 취업준비생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올 취업시장은 졸업생보다 취업준비생이 능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 마디로 총성 없는 취업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전쟁'에서 생존하는 특단의 방법은 없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다만 준비된 자만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기업 역시 군계일학 같은 준비된 자를 뽑기 위해 전형방법을 다양하고 색다르게 취하고 있다. 취업준비생과 사회진출을 앞둔 대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실전 취업진로 가이드에 대해 인재관리 전문 연구기관인 한국인재연구원 이형남 원장에게 들었다. "기업은 기본이 갖춰진 준비된 인재를 선호"
"전반적인 경기 불안과 기업의 투자 위축으로 올 취업 시장도 작년에 비해서 밝지 않다. 하지만 삼성·LG 등의 대기업은 작년 채용 수준의 채용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며 은행·증권사·보험회사 등 금융 회사들이 적극적인 지점 확장으로 채용이 증가할 전망이다. 업종별로는 유통무역·건설·물류운수 등 3개 업종만 작년보다 채용규모를 다소 늘일 전망이고, 나머지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식음료·제약·기계철강조선중공업의 채용이 대폭 감소될 것이다. - 기업이 사회 초년생들에게 요구하는 인재상은 어떤 것인가? "기업이 추구하는 비전과 핵심가치를 수용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조직문화에 융화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다. 또, 동일하지는 않지만 ▲진취적이고 패기있는 사람 ▲인화력이 있는 사람 ▲대인접촉능력이 있는 사람 ▲자기개발능력이 있는 사람 ▲유연한 사고와 창의력을 지닌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일반적인 기업의 인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직자들은 맞춤형 인재, 준비된 인재로서의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막연하게 준비하지 말고 취업하고 싶은 기업·업종·직종을 명확히 정하고 그에 맞춰서 준비해야 한다." - 서류전형을 통과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구직자가 저학년 때부터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토익 등을 준비한다. 이런 기본적인 것이 갖추어져 있다면 해당 기업과 지원하는 업무에 맞는 본인의 경험과 역량을 자기소개서에서 차별화시켜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자기소개서는 정직하게 제대로 써야한다. 어떤 계기로 이 회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내가 알고 있는 회사에 대한 정보는 무엇인지 등 회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물론, 내가 지금까지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이러한 경험들이 어떻게 직무에서 발휘될 것인지, 왜 내가 이 직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 어떤 준비를 하면 효과적인 면접을 볼 수 있을까요? "자신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원하는 회사와 업무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야 하고, 지원 분야 전공지식은 물론, 지원 분야 전문용어에 대해 능통해야 한다. 자신을 과대·과소평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 회사가 나의 인생목표와 부합하는지에 대해 관념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판단해 회사를 선택한다면 면접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학교에서 진행되는 각종 취업 프로그램, 모의 면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자신의 면접모습을 촬영하여 제 3자로부터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취업 준비해야 성공" - 보통의 기업들은 현대의 개인주의와 과거의 동일체 정신 중 어느 것을 원하나? "어느 한쪽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조직의 특정상 동일체 정신이 중요시 되는 것은 여전하지만, 다양성·차별성이 경쟁력이 되기 때문에 기업에서도 사원 개인의 독특한 성향과 개성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다. 하지만 조직문화에 반하는 개인주의 성향은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 대학 새내기들이 취업 준비는 언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달라. "입학하는 순간부터 해야 한다. 사회에 진출하려면 2~4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좋아하는 것, 잘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저하게 분석해야 한다. 2·3학년 때는 자신이 일하고 싶은 직종·업종을 선택해서 능력을 키우고 인턴십이나 아르바이트와 같은 해당 직무관련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래서 4학년 1학기 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4학년 2학기에는 취업을 위한 실전단계에 돌입하여 졸업 전에 취업을 해야 한다." - 신입사원들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조언한다면? "노동조합은 종업원들의 목소리를 고용주에 전달하여 보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자칫 노동조합이 고용주인 회사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거나 폭력을 사용해서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지만 노동조합이 사측과의 의견조율창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는 꼭 필요한 제도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개인적인 의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회사의 분위기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결정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보는 것도 좋다. 그 후 전후사정을 살핀 후 자신이 회사생활에서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결정할 수 있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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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이곳을 찾은 이유는 최근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는 요리에세이 <솔로 쿠킹 다이어리>의 작가 황명화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한일마을은 마을 앞을 지나는 고속도로 밑 지하도를 통해 외부와 소통한다. 통로를 지나자마자 위치한 마을 초입 버스 정류장에서 작가와 만났다. 초행길에 기자가 헤매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러나 '길치'인 기자는 이미 한참을 헤맨 후였다. '맛' 있는 서평을 쓰기 위해 찾아나선 길 그녀는 작가란 이름보다 에세이스트로 불리고 싶어하는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이다. 그녀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쿠킹'한 요리를 맛보고 싶어서였다. 명색이 요리에세이 책인데 밋밋하게 서평만 쓰는 것은 '맛'이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쳐들어갈 테니 닭볶음탕(닭도리탕)을 해달라고 했지만 칼자루를 쥔 그녀는 라자니아를 내놓겠단다. 마을 어귀에서 그녀의 집까지 걷는 길은 조붓한 산길이다. 바닥에 시멘트만 깔리지 않았다면 때 이른 봄 냄새가 코밑으로 올라왔음직한 날이다. 한 달 전 이사를 한 이곳은 마을의 제법 높은 곳에 있는 전원주택이다. 아담한 앞마당과 넓디넓은 신갈저수지가 뒷문 밖으로 펼쳐져 있다. [삶] 대문에 다다르자 조카 인재와 딸내미(?) 큰별이가 마중을 한다. 그녀와 함께 사는 식구들이다. 2년 전부터 남동생의 딸을 맡아 기르고 있다. 싱글인 그녀가 11살 조카를 키우는 것에 대해 그녀는 '다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이제 막 반항기에 돌입한 멍멍이 한 마리와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같이 식사를 해보니 그 말이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녀가 블로그에 써놓은 조카 육아일기를 보면 웬만한 엄마를 능가하는 뒷바라지를 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조카에 대한 연민이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 성장하길 바라는 고모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때론 까칠한 척 하지만 조카 역시 고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쉽게 느끼게 하는 순수한 아이였다. 딸내미 큰별이는 견공(犬公)이다. 레브라도 리트리버종의 5살 된 암컷이다. 맹인안내견으로 길러졌는데 발작 때문에 지금은 평범한 반려동물이 됐다. 큰별이와 인연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좀 전과 달리 반짝거렸다. 32시간 동안 36번 발작을 일으키며 사선을 넘나들던 큰별이가 기적적으로 소생했을 때, 솔로인 그녀에게 딸이 생겼다. 털이 사정없이 날리는. 왜 혼자 사느냐는 우문은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현답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가 사는 방법을 둘러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두 딸과 아웅다웅 밀고 당기면서 짬짬이 군침 도는 요리와 맛있는 글을 쓰면서 지내는 삶이 나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글·책] 그녀의 글은 요리보다 맛있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 학교 대표로 독후감을 써내라는 말을 잘못 듣고 반장도 아닌 그녀가 원고지 뭉치를 내밀었을 때, 난감해 하던 선생님의 표정. 결과적으로 반장은 떨어지고 그녀가 대상을 수상을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꾸준히 그리고 왕성하게 자신의 삶을 글로 표현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번 책은 싸이월드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그녀의 일상을 눈여겨본 출판기획자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한 것이다. 그녀가 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큰별이에 관한 책 <사랑해 큰별아>를 지난 2004년 말에 선보인 바 있다. 그녀는 지금 세 번째 책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 감춰뒀던 이야기 보따리가 한꺼번에 풀어진 탓에 한해에 두 권이라는 다작을 하게 됐다. 이번 책은 친구를 주제로 우화 형식의 글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그녀의 진정한 글쓰기 내공을 가늠하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지난주부터는 <동아일보> 생활면에 매주 금요일 '골드미스 다이어리'라는 에세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요리보다 글 솜씨가 더 좋다는 의미다. 요리가로 이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녀의 걱정은 기우가 됐다.
이날 준비한 요리는 라자니아. 17인치 모니터만한 접시에 두께 10센티미터짜리 빅 사이즈다. 열댓 명이 달라붙어도 너끈한 양처럼 보이는데, 그녀는 8등분을 한다. 손이 큰 탓이다. 두 접시를 먹고는 '만세'를 불렀다. 저녁도 먹지 못할 정도로 배를 채웠다. 요리는 접시에 담겨서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나누면서 주고받는 사는 이야기까지 요리가 지닌 가치이다. 요리가 주는 맛도 맛이지만 인생의 감칠맛을 무엇이 감히 능가하랴. 멀리 신갈저수지 물빛이 조금씩 변해갈 무렵 맛있는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안 정리가 덜 된 상태라 집주인도 기자도 서로 미안했다. 들고 갈 것이 마땅찮아 미술사 관련 서적을 한 권 선물했다. 싱글인 그녀와 두 딸의 열렬히 배웅을 받으며 한일마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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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삼변과 가족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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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2월 법관양성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변영만(卞榮晩)은 이듬해인 고종43년(1906년) 3월 22일 박사(博士) 임명을 받는다. 법관양성소 박사는 교관과 더불어 후진 사법관리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법관양성소는 설치 초기 교육기간이 6개월(우등일 경우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법무 관리를 양성하기에는 지나친 속성으로,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삼권을 분립하는 근대적 사법제도로 가는 과도기 상황에서 법관양성소의 존재 가치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당시 이곳에서 수학하던 그는 숱한 고뇌 속에 법무 관리의 길을 걸었다. 법관양성소 졸업 직전인 11월 말 교관이던 정명섭(丁明燮)이 비분강개하며 올린 상소가 내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을사늑약 역적들의 머리를 참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목도한 변영만은 거취에 대해 격렬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정명섭의 상소내용이다.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무슨 요량이 있으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의 절박함이 이제 목전에 다다른 상황인 만큼 폐하께서는 만물을 다 감싸주시는 인자함 대신에 용기 있는 결단을 덕으로 삼으시고 속히 역적들의 머리를 참하시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소서. 그리고 이른바 조약을 즉시 파기하시되, 저들이 혹 파기를 거부하는 야비함을 드러낸다면 법규에 어긋난 조약은 무효라는 이유를 대며 준엄한 말로 물리치시고, 아울러 이런 연유를 각국의 공사관에 선포하여 증명을 받으소서” 법관양성소 거쳐 법관전고소 합격... 보성전문 법률과서도 수학
같은 달 12일 관보에도 그 같은 사실이 실렸다. 법관전고소는 법관 임용을 위해 전형을 하는 곳이다. 변영만은 이곳에서 홍면희(洪冕憙)를 만나는데, 그는 법관양성소 선배로 후일 변영만과 또 다른 인연을 맺는다. 변영만은 법관전고소에 있으면서 학구열을 계속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1907년 3월에 보성전문학교 법률과 학년말 시험에서 우등을 했다. 야간학부였던 것을 보면 법관전고소 소속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성전문은 고종이 신설한 학교로 1905년 4월에 학교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후일 고려대학교로 학통을 잇는다. 성균관에 이어 서울대 법대의 학통을 잇는 법관양성소와 고려대 법대의 보성전문 법률과를 두루 수학한 변영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변영만은 판사로 임용된다. 그 해 말 그는 판사서임을 받고 첫 임지로 목포구재판소 판사로 발령 받았다. 그 무렵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의 국권을 야금야금 빼앗은 일제가 1907년에는 ‘한국내정에 관한 통감의 권한에 대한 협정’(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사법권까지 모조리 일제의 관할로 넘어갔다. 심지어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우리 내각의 관리로 임명하는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변영만은 이런 풍토에서는 더 이상 관리로서 국가의 녹을 먹는다는 것이 부질없다고 판단, 판사이던 1908년 미련 없이 법복을 벗었다. 1908년 사법권 피탈되자 판사 사임... 변호사·저술 활동
요즘과 마찬가지로 당시는 판사에서 법복을 벗으면 변호사로 개업이 가능했던 시기였나보다. 이후로 그가 변호사로 활동했던 흔적이 짧게나마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변호사 생활에 그리 흥미를 가진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저술 활동에 치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무렵 <세계삼괴물>(1908)과 <이십세기의 참극 제국주의>등 일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서적을 번안하거나 직접 써서 발간했다. 이들 책은 후일(1910) 일제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황성신문> 등과 함께 금서로 묶어 발간과 배포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변영만은 저술 활동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해이기도 하다. 1908년 1월에 만들어진 기호흥학회에 관여했다. 8월 25일 발간된 기호흥학회 월보 창간호에 그는 ‘대호교육(大呼敎育)’이란 제목의 논설을 실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갈파하는 글이다. 창간사 논설로 그의 글을 실은 이유를 알 듯하다. 기호흥학회는 대외적으로는 교육진흥이었으나 실제로는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한 단체였다. 을사조약 후 국내 대부분의 애국계몽 운동자들은 국권회복의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이 단체를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그러나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다가 1910년 해산됐고 월보 역시 발간이 금지됐다. 일제가 압제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면서 한반도를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변영만은 법복을 벗고 신의주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변호사를 개업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방재판소 변호사명부에 등록하고 <관보>에 공고가 나야하는 데 그런 기록이 없다. 그는 아마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 변호를 위해 여순으로 가려고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1910년 2월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변호사회가 안 의사의 변호사로 변영만을 파견키로 한 것이 2월 2일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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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있으면 새 학년, 새 학교를 위한 준비 기간인 봄방학이 시작됩니다. 여름ㆍ겨울방학과는 달리 아주 짧지만 새로움에 대한 호흡을 가다듬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약간의 긴장도 됩니다. 특히 초등학교 6년을 마치고 중학교로 진학하는 청소년들에겐 감회가 남다를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초등학생으로서 마지막 방학에 무엇을 할까요? 더 훌쩍 커버리기 전에 읽기 좋은 책 몇 권을 소개합니다. [장편] <산골집에 도깨비가 와글와글>
부뚜막 도깨비 따끈따끈, 빗자루 도깨비 쓱싹쓱싹, 마루 밑 도깨비 엉금엉금, 감나무에 매달린 도깨비 대로대롱, 창호지 도깨비 중얼중얼, 솜이불 도깨비 푹신푹신, 그리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달그락달그락 등 모두 일곱 도깨비. 이들이 세상에 나오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모험담이 깊은 가을밤을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요술감투를 쓰고 숨기 놀이를 하다가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과 사이에서 일어나는 도깨비 이야기, 그리고 무시무시한 산귀신과 싸우면서 한 뼘씩 성장하는 도깨비들 이야기. 원래 도깨비들은 요술감투를 써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도깨비도 사람들이 하는 짓에 놀라서 감투가 벗겨질 때가 있는데 이때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때 본 도깨비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세요? 도깨비에게도 천적이 있다는 사실. 갈고리 같은 긴 손톱을 가진 산귀신이 바로 도깨비를 잡아먹는 답니다. 무시무시한 산귀신에게 잡힌 쓱싹쓱싹을 구출하는 친구들의 숨막히는 모험담이 오슬오슬 마지막 찬 기운이 맴도는 봄방학을 후끈 달아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 책은 5년 만에 다시 출간한 작품입니다. 세밀화의 대명사 보림출판사의 작품답게 삽화가 글만큼 재미납니다. (채인선 글, 이혜리 그림, 보림출판사 펴냄, 191쪽, 9500원) <주몽의 알을 찾아라>
주몽은 알다시피 하백의 딸 유화가 낳은 알에서 나온 아들입니다. 주몽은 후에 고구려의 시조가 됩니다. 이 책은 그러나 고구려의 안장태장과 백제 처녀 한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여기서 '주몽의 알'은 그저 허구적 소재일 뿐입니다. 서울, 평양, 상하이를 넘나드는, 동화에서는 보기 힘든 장대한 스케일과 웅혼한 서사적 내용이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들의 기호에 적합할 듯합니다. 저자 백은영씨는 신화는 역사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아울러 전설 역시 신화와 비슷한 역사의 오브제일 수 있다고 단정합니다. 때문에 경기도 고양 지역에 전해져 오는 안장태장과 한주(구슬아씨)의 이야기도 사실일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합니다. 주인공 둘은 서로 적국에 속한 적대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합니다. 저자는 이들 이야기의 배경에 신화로 채색된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 그리고 고구려 역사를 덧칠해 완벽하게 그립니다. 특히 고조선의 천부인을 우주에서 떨어진 거대한 운석으로 만든 것으로 가정하고 이들이 고구려의 국보로 전해져 현대에서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모험담을 판타지 기법으로 엮었습니다. 아이들 동화치고는 보기 드물게 280여 쪽에 이르는 장편동화입니다.(백은영 글, 김재홍 그림, 푸른책들 펴냄, 287쪽, 9800원) <사라의 마법 과학숙제>
사라는 학교의 과학숙제를 자신이 지켜 본 마법으로 정하고 과학을 가르치는 와이어스 선생님께 보고합니다. 그리고 예상보다 쉽게 승낙을 받고 개구리 마법을 썼던 아나스타시아를 찾으면서 실제 마법에 걸려 돌이 되는 등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사라는 새가 되기도 하고 개미가 되기도 합니다. 마법사와 과학숙제를 위해 기꺼이 무엇이든 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아이와 그들과 동화되면서 어린 시절 기억 조각을 찾는 선생님 사이의 교감. 그러면서 무게와 질량의 차이 등 과학 지식을 슬쩍 끼워 넣어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하는 등 정보전달에도 소홀함이 없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해 지적이고 재미난 이야기를 쓰기로 유명한 헤이즐 허친스의 작품입니다. 판타지 소설류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좋아할 것입니다.(크리스틴 델레젠 그림, 조윤숙 옮김, 세용출판, 9000원) [단편집] <멧돼지가 기른 감나무>
특히 구수한 향토색 짙은 단어와 적절한 의태의성어 사용으로 글이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듯합니다. 먹이를 찾아 사람 사는 마을 근처 텃밭까지 내려 온 멧돼지 가족과 텃밭주인의 살가운 교감은 가슴을 훈훈하게 데워줍니다. 그러다가 가뭄으로 인간 세상이 피폐해지자 멧돼지 입으로 작물이 들어가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이 사냥꾼을 고용하면서 이야기는 인간과 동물의 양립구도로 전개된다. 가족을 살리기 위한 아비 멧돼지의 필사적인 몸부림과 사냥꾼이라는 잔인함으로 대변되는 인간과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구도. 긴장과 분노, 그리고 양측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기며 이야기가 끝을 맺을 때, 자칫 눈가에 이슬이 맺힐 수도 있습니다. 책에는 이 밖에 외눈박이 암탉, 주황색 뿔을 가진 괴물, 집토끼가 기른 산토끼, 호랑할매 여우 목도리 등 단편 5편이 실려 있습니다. 동물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좋아할 만합니다.(김성민 그림, 사계절, 8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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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si는 메마른 오늘을 살아가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입니다. 마이너한 '그녀'의 일상에서 건져 올린 삶의 철학을 그림과 함께 글로 옮겨보았습니다" 전파를 타고 전달되는 그녀의 목소리는 밝기만 합니다. 책머리를 장식한 '나는 외롭다'는 울림은 아무래도 거짓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전화와 이메일, 그리고 문자메시지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점차 외롭다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목소리와는 달리 텍스트는 여전히 우울한 백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직접 책을 내고 실제로 캐릭터를 팬시상품으로 만들어 낸 그녀의 애착에서 큰 희망을 보게 됩니다. 그녀와의 일문일답입니다. - 책 잘 봤습니다. 읽었다기보다는 (독특한 그림 때문에)봤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습니다. 고백하자면 내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작가의 마음이 전해져서일까요? 아직도 책처럼 백조로 살고 계시나요? "저는 동정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저를 향해 불쌍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게 당신의 삶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난감합니다. 대답을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긍정을 해야 할지, 부정을 해야 할지, 저는 망설이다가 가볍게 웃어넘기고 맙니다. 긍정을 하기에는 허구가 많고, 부정을 하기에도 진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현실감이 너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근황은 책이 출판되기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방에 처박혀서 그림을 그리는 게 저의 주요 생활패턴이며 가끔 서점을 방문하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동네 한 바퀴를 걷는 게 일상입니다."
"moosi의 캐릭터는 장애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캐릭터입니다. 학창시절 눈이 비정상적으로 큰 장애여성을 본 적이 있고, 그 인상이 강하여 캐릭터로 만들고자 시작된 캐릭터입니다. 대학시절 저는 캐릭터를 들고 출판사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이 캐릭터가 무섭다, 징그럽다, 일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저는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고집 있게 끝내 예쁘장한 것을 거부하고 무섭다는 캐릭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캐릭터는 슬픔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예쁘장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김이 다 다르고 미의 기준이 다른데 왜 저의 캐릭터는 안 된다는 것인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캐릭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인지를 절감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moosi가 예쁘기만 합니다. 캐릭터 작업과정은 이러합니다. 연필로 그려서 수정하고, 스캐닝하고, 일러스트레이터라는 프로그램으로 그래픽 처리를 합니다. 그림이 간단해 보여도 아주 힘든 작업입니다. 모든 것은 손을 거치고 다시 보고 다시 수정하고 이런 식입니다." "순수 창작물은 인터넷보다 책으로 먼저 선보이는 게 중요" - 글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글 속에 의미를 담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의도적으로 뜻을 함축해 담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원래 글쓰기 패턴이 그런 것인지 궁금합니다. 책에 나온 내용이 개인홈페이지 또는 블로그 등의 형식으로 인터넷으로 발표된 것인가요? "처음에는 유머러스한 토막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지하셨겠지만 일관성이 좀 떨어집니다. 가볍게 부담 없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쓰다 보니 무언가를 담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합니다. 제 자신이 무거운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점차 글이 무거워졌습니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은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의 형식으로 인터넷으로 발표된 적이 없습니다. 순수창작 캐릭터와 글을 저는 책의 형태로 출간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개인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에 올릴 수는 있겠지만 저에게는 책으로 출간되는 게 중요했습니다."
"저는 기성 작가가 아닙니다. 당연히 출판사의 제의가 아닙니다.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나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화는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거절되었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캐릭터에 마음을 들이부은 상태이기에 포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 후 다른 구상을 하게 됐습니다. 이 캐릭터를 버릴 수 없어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먼저가 아니고, 캐릭터가 먼저입니다. 이야기는 제가 처한 현실을 담기 위해 혹은 현실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구상되었습니다." "힘들어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됐으면" - 끝으로 우리나라 청년실업에 대한 단상과 백수, 백조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그리고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한다면? "저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인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해결방안을 물으시니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그림 그린다고 이것저것 쌓아 놓고 비좁아진 방 안에서 생활하는 제가 그들에게 어설픈 이야기를 늘어놓을 처지가 못 됩니다. 저의 처지보다 나을지도 모르는데, 감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소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지키면 다른 것은 나쁘더라도 괜찮습니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이 조삼모사이기 때문입니다. 불안하지만 기쁘기도 합니다.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도 모든 것을 잃는다거나, 모든 것을 얻지 않습니다. 한쪽만 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미안합니다. 저 역시 같은 처지라 많은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책을 출간한 이후 잡지사 기자 분이 힘이 되는 한 마디를 발췌해달라고 했을 때, 비로소 저는 알았습니다. 이 책 속에 힘이 되는 한 마디가 거의 없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서툰 낙관주의로 또 다른 상처를 주기는 싫습니다. 저는 그것이 때로는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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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2001년 반 총장이 외교부차관에서 해임됐을 때 원고지 50매 분량의 기사를 <월간조선>에 기고해 그의 낙마를 아쉬워했다. 주변의 힐난도 있었다. 장관도 아니고 차관 낙마를 뭘 그리 크게 다루느냐는. 그러나 기자에겐 특별한 마음이 있었다. 기자가 2001년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입학지원 때 선배 자격(84년 졸업)으로 추천서를 써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취재원 이상의 인품을 그에게서 발견한 탓이다. 기자의 바람대로 반 총장은 외교관으로 복귀했고, 대망의 8대 UN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기자는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 특집기사를 준비했고, 기사가 나간 지 며칠 후, 퇴직 후 출판사를 운영하는 신문사 선배의 전화를 받는다. 반 총장 스토리를 책으로 한번 써보라는. 그래서 탄생한 책이 <조선일보> 정치부 이하원 기자가 후배와 함께 쓴 <조용한 열정, 반기문>이다. 책을 통해서 알았지만 반 총장은 충주의 수재였다. 집안은 부유했지만 인심 좋은 아버지의 '실패한 빚보증'으로 이내 가난해진다. 반 총장의 삶은 마치 지어낸 것처럼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충실히 따른다. 게다가 반 총장의 부인인 유순택 여사는 소박하고 입이 무겁다. 그리고 빠듯한 살림이지만 착실한 내조로 집안을 세운다. 이 책보다 이틀 앞서 출간된 아주 비슷한 책이 있다. 둘 다 반 총장의 성공에 맞춰 준비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YTN 정치부(외교통상부 출입) 신웅진 기자의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라는 책이다. 이 역시 반 총장을 가까이서 봐온 기록이다.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비슷하다. 지금 서점가에서 이들 서적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이유를 들여다 보면 세상은 여전히 평범 속에서 비범함을 찾아내는 매력이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가난한 수재의 성공 스토리가 진부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많이들 찾는 걸 보면. 한편으론 반 총장의 수더분한 매력일지도 모른단 생각이다. 실은 책의 서평보다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다름 아닌 저자인 이 기자에 관한 것이다. 나와는 같은 교회를 섬기고 있고 또 같은 연배 모임이기도 하다. 이 기자 자신이 알면 불편해 할지도 모르지만 책의 탄생 뒤에는 이 기자 개인에겐 힘들었던 일이 참 많았다. 그렇기에 책이 세상 빛을 본 것은 반 총장의 당선만큼이나 값진 일이다. 아버지는 치매·폐렴 합병증, 아들은 백혈병 투병
나 역시 그때 제주도에서 소식을 듣고 같은 아비의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는 그날 이후 매일 새벽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리고 직장을 마치면 여의도성모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아들을 간호했다. 그는 언제나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고, 아들의 병세를 중간 중간 기도하는 이들을 위해 알려줬다. 그 사이 혈소판 헌혈을 통해 아들과 피를 나눈 성도(聖徒)들이 생겨났고 '피의 번제'가 하늘에 닿았는지 9월 하순경에는 병세가 호전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사이 6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까지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간병하랴, 직장에 나가랴, 취재하랴, 기사 쓰랴, 남는 시간에 책 쓰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내색 한번 없이 만나면 언제나 아들 일에 대해 감사함을 연발했다. 그러면서 책을 한 권씩 선물하고 싶다는 것을 사인을 부탁한다는 명목으로 각자 구입키로 했다. 1월 마지막 주일인 28일. 오전 9시 예배를 마치고 조촐한 책 사인회를 열었다. 이 기자는 연방 쑥스럽고 밑바닥이 드러날까 두렵다며 어려워했지만 그의 노력의 소산물을 격려하고 싶은 친구들의 마음을 그가 헤아렸다. "유성호 형제님.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복된 2007년 되시길. 李 河 遠"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이 기자 아버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향연 72세. 이 기자는 올 초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 3주간 입원했다가 소생 가능성이 없어 집으로 모신 지 1시간만에 평안히 주무시는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책 제목에 올려진 '조용한 열정'은 반 총장과 이 기자가 공히 나눠 써도 되겠단 생각이 들은 것은 문상을 다년 온 후였다. 이번 책은 힘들었던 만큼 의미 있는 성과물인 셈이다. 꿈을 키우는 청소년들에게 질 좋은 자양분 같은 책이 될 듯하다.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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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성경 <호세아서>를 저술한 호세아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배경이 된다기에 성경책을 열어봤다. 호세아서 1장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노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할 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북왕국이스라엘의 왕 여로보함 2세 때 선지자의 소명을 받아 이후 여섯 명의 왕을 거치면서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40여년간 예언 활동을 펼친 인물.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한다. 고멜은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로 호세아의 아내가 되어 세 자녀(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를 낳지만 둘째와 셋째는 사생아다. 그녀는 남편 호세아를 버리고 정부와 더불어 먼 타향으로 도망치지만 결국 정부에게 버림받고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창녀가 된다. 호세아는 그런 그녀를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다. 이 책은 호세아서 1장부터 3장까지 기록된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써내려간 작가의 기독교적 상상력에 탄탄한 글쓰기가 뒷받침된 역작이다. 실제로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의 이름도 호세아다. 미가엘 호세아. 그리고 여성은 사라에서 이름을 바꾼 엔젤. 성경 <호세아서> 고멜이야기 모티브로 쓴 순수 사랑이야기 이야기는 1835년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시작된다. 어린 사라의 가정에 대한 묘사가 첫 장을 장식하면서 순애보를 찾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아버지에게 축복받지 못한 사라의 탄생과 이를 두고 싸우는 그녀의 부모. 처음부터 사라의 삶이 순탄치 못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7살에 하녀로부터 하나님의 진리가 어느 정도는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사라. 그녀는 8살에 홀로 엄마의 죽음을 지켜야 했고 죽은 엄마가 쥐고 있던 묵주를 던지며 하나님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울부짖는다. 그리고 결국 떠다니는 신세가 된다. 타인에 의해 엔젤로 이름이 바뀐 채. 1850년 캘리포니아 주광맥이 위치한 패어러다이스 매춘굴. 엔젤이 베푸는 4온스짜리 호의를 얻기 위해 제비를 뽑는 군상들. 열여덟 살이 된 엔젤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엔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감정은 증오보다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권태였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열여덟의 권태. 자신만의 쾌락만 추구하는 남자들에 대한 증오.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회한.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그래서 내린 가장 손쉬운 결론은 자살. 그러나 용기부족으로 번번이 실패한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책은 그리고 끝없는 내리막길로 치닫는 그녀의 10년을 아주 빠른 속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한 남자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부분은 심리상태 등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미리 밝히자면 미가엘 호세아와의 결혼 생활은 '곁에 있었다 떨어졌다' 무려 68년이었다. 정직한 농부 미가엘은 어느 날 거리에서 엔젤을 만나 한눈에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예언의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선지자 호세아처럼. 스물여섯의 청년 미가엘은 그 후 엔젤을 찾아 매춘굴을 찾았다. 직접적인 첫 만남에 대해 엔젤은 미가엘을 보고선 모든 신경세포가 날뛰는 묘한 거북함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미가엘은 그녀에게 섹스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라며. 그리고 결혼을 이야기 한다. "주여,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자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면 100만년은 필요할 겁니다. 정녕 이 여자가 당신께서 제게 정해주신 그 여인이 맞단 말입니까?" 매일 밤 미가엘은 엔젤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엔젤은 격렬히 흔들렸다. 그러나 현실과 그녀의 권태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미가엘 역시 요지부동의 그녀를 보면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어째서 매춘부와 결혼하라는 것이냐며. 그때마다 주님은 같은 답으로 응답했다. "그 여자야말로 너를 위해 내가 택한 자니라. 사랑하는 자여, 내 뜻을 행하라. 내가 너를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고 네 발을 반석위에 세우고 그 걸음을 견고케 해주었도다. 엔젤을 구하러 돌아가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 - 마태복음 책 속에는 미가엘과 하나님의 끊임없는 대화가 나온다. 묻고 의뢰하고 응답받는. 결국 말씀은 이루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엔젤은 미가엘과 함께 살게 된다. 미가엘의 동생 바울의 등장과 다시 매춘을 시작하는 엔젤, 그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대화 속에 위로를 주는 세심한 묘사. 책을 번역한 김지현씨가 날밤을 꼬박 세우고 책을 읽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책은 시선의 외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추리 소설보다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자신을 배신한 창녀를 끌어안은 채 쇠약하고 낙심한 채 길을 잃고 헤매는 이름 없는 아이라고 위안하는 미가엘. 그리고 차츰 변화하던 어느 날 하나님을 영접하는 엔젤. 어두운 음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할 즈음, 그 옛날 포주가 사탄처럼 나타나는데….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을 몸소 행한 실천서. 소설의 내용은 다소 통속적이지만 거침 없이 시간을 헤쳐가는 문체와 흐름은 독자로 하여금 책의 두께를 무감하게 만든다. 이쯤이면 원작자를 미국 제일의 감성작가라고 치켜세운 이유에 수긍이 간다. 옮긴이는 책을 달걀노른자가 들어간 뜨거운 코코아 한잔 이라고 표현했던가. 거들자면 '정말 고소한 노른자였더라'고 한 마디 하고 싶다. 아가페적 사랑이 무엇인지 찾는 이들에게 '완전' 권하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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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3. 09:14
[부평삼변과 가족사 5]...
2007. 2. 3. 09:14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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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삼변의 맏형 변영만은 성균관에서 수학 후 190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했다. 1889년생이니 그의 나이 17세 무렵이다. 법관양성소는 나라의 사법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법부(法部)직할 교육기관이다. 법관양성소는 입소 나이를 제한하고 있다. 20세 미만과 35세 이상은 들어오지 못하게 세칙으로 정해 놨다.
후일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일제가 그의 반일활동 일거수일투족을 적어 총독부로 보고한 정보보고서에는 본래 나이보다 많게 기재돼 있었다. 이는 법관양성소 입학 나이를 20세로 계산했을 때 가능한 나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한문작문, 국문작문, 조선역사 및 지지대요(地誌大要, 지리) 등의 입학시험을 거쳐 법관양성소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도 주눅 들기는커녕 재기를 발휘해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의 천재'라고 불릴 만 했다. 어린 나이 불구하고 법관양성소 하계시험서 102명 중 3등 1905년 7월에 치른 여름시험 성적을 보면 평균 93점으로 102명 중 공동 3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입학하자마자 치른 시험으로 추론된다. 변영만은 그해 12월에 졸업시험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법관양성소 교육과정은 6개월이었다. 따라서 역산하면 7월 시험은 입학 직후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수많은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궁내부특진관 조병세, 판돈녕사사 조병식, 군부협판 이한영, 규장각학사 이용태, 정이품 박기양, 정삼품 안종화 등이다. 이들 중에는 법관양성소 교관 정명섭도 끼어 있었는데, 상소는 '조약(당시표현은 한일협상조약) 무효화와 매국적신의 처벌'을 요구한 강도 높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명섭은 1895년 사립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근대 법률제도 도입된 초기부터 법조계에서만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재판소 주사, 판임관, 검사, 법관양성소 교수·교관 등을 역임했다. 수많은 대신들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골지고 뚝심 있는 교관이었다. 스승 정명섭, 을사늑약 매국적신 처벌 상소올린 강골 이런 그가 어린 변영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분명한 것은 교관과 학생 모두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이를 뒷받침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법관양성소 학생들은 더 이상 학문을 해나갈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대부분 학교에 나오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법관양성소는 기능이 유명무실해지자 급히 학생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법관양성소 이면우 소장이 법무대신에게 보고한 자료를 보면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나라의 진흥이 인재양성에 있고 인재양성은 학교확장에 있는바 본 소는 이미 법률전문학교로 중요한 곳입니다.(중략)조약체결이후~ 네 개 반 70여명의 학생이 대부분 돌아갔고 남아 있는 자가 불과 수십 명이오니~ 이들을 불러서 공부하게 해야 합니다(후략)" 학생들이 왜 학교를 등지고 가버렸을까. 일제의 공작이 있었을까 아니면 학생들 스스로 앞날을 불투명하게 여겨 등진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을사늑약에 대한 저항의 표시를 분명히 한 것인가.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특히 일제가 탄압해서 수많은 인원이 법관양성소를 등지고 떠났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불과 반년(우등일 경우 3개월)이면 사법관리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눈앞에 두고 쉽게 박차고 나오기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동은 일종의 집단 저항이었던 것으로 귀결된다. 예비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을까 판단해 볼 수 있다. 이런 학풍과 반일사상을 뚜렷한 교관 아래서 17세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변영로는 분명히 반일, 항일, 배일 정신을 받아들여 싹틔웠을 것이다. 이는 그가 1907~1909년 사이에 발표한 10여 편의 애국계몽적 논설과 2권의 제국주의 비판서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법관양성소의 6개월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12월 졸업시험에서도 그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 당당하게 전체 8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는 법관양성소의 4회 졸업생이 된다. 국권을 모조리 빼앗긴 을사늑약의 해 1905년, 법관양성소에서 변영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권을 앞세운 열강의 침탈 속에 격동하는 대한제국처럼, 그 역시 수많은 날을 고뇌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허상을 벗겨낼 날 선 칼을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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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현실로 타나났다. 2004년 11월 중국전영자료관을 조사하던 영상자료원 자료조사단은 <어화>의 완전판과 <군용열차>(1938) <지원병>(1940), 기록영화 <조선>(1938)을 찾아낸다. 2005년 2월 서울의 국회의사당.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견된 영화를 28분 분량으로 편집해 하이라이트 상영했고 그와 관련된 기자회견이 열렸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날 현장에 대해 "한국영화 전공자들은 고분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흥분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 영화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은 기쁨이었던 것이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는 소설을 전공한 문학도였던 저자 김려실이 영화사가(映畵史家)가 되어 쓴 책(논문)이다. 저자는 일본영화가 조선영화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다가 결국 전시국가가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대해 풍성한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제국을 투영한다. 식민지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영화 중 12편이 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다. 이들은 모두 발성영화이며 <미몽>(1936) <심청> <어화> <조선>을 제외한 8편은 이른바 친일영화로 분류된다. 저자는 이들 중 <심청>과 <조선>을 뺀 10편의 영화에 대해 텍스트 분석을 했고 <수업료> <그대와 나> <복지만리> 등은 원작, 시나리오, 시놉시스, 개요 등을 수집해 내용을 재구성하는 노력을 담았다. 저자가 표현하는 식민시대 제국주의 영화의 '문화수탈'은 상상을 넘어선다. 소위 친일영화라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로 스크린에 투영된 그 시대의 광기를 접하는 것은 괴로움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현존 필름을 실증적으로 분석해 날조된 학문적 패러다임을 냉정히 평가하는 것이 학자의 사명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1901~1945년까지 영화사 밀도 있게 추적
특히 조선영화령이 내려진 1940년을 기점으로 우리 영화 곳곳에 제국주의 군화발로 찍혀서 관람객의 뇌리를 세뇌시킨 상황을 밀도 있게 들여다본다. 조선영화령은 영화의 생산·배급·관람을 철저히 통제하는 가혹한 법률이다. 예를 들어 영화산업 허가제, 영화제작자 및 종사자 등록제, 대본 사전검열, 외국영화 상영제한, 문화영화 강제상영, 14시 미만 영화관람 금지 등이 들어 있다. 전후 일본에서조차 이 법률을 '독일을 모방해 실시된 영화의 예술성을 말살한 문화 통제', '예술 표현의 자유를 대폭 제한할 목적으로 실시된 악법'이라고 평가했다. 입법 당시 반대한 일본인은 영화평론가 이와사키 아키라가 유일했다고 한다. 법이 발효되고 영화에 대한 통제가 시작되는데, 일본과 우리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일본의 경우 고매한 국민적 이상을 나타내게 하여 국민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동시에 국책 수행에 이바지하는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활을 지도하는 생활독본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 국가의 대 이상을 위한 성전(聖戰)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 붙었다. 즉 내선일체를 포함하지 않는 영화는 제작이 어려워지고 우리나라 사람이 출연했어도 일본어로 만들어졌다. 이 같은 상황을 위정자들은 '영화신체제'라 불렀다. 저자는 신체제 상황에서 재미난 현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선일체 영화 제작비에 좌파가 친일로 전향 불사 내선일체 영화를 만들 경우 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따르고 해외 수출까지 가능하게 되자 좌익 카프에서 지식인들이 전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돈 앞에 이념이 무력해지는, 아니 개인의 사회주의 신념이 제국주의에 어떻게 함몰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 시기 극장가 역시 큰 변화를 맞는다. 지금처럼 극장 체인이 형성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1943년 경성(지금의 서울)에는 극장이 17개였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던 곳은 화신영화관 뿐이었다. 동보극장, 약초극장(스카라), 성보, 동보중앙극장 등이 도호(東寶)체인, 명치좌, 대륙극장(단성사), 성남영화극장 등이 쇼치쿠체인, 닛카츠가 희락관, 황금좌, 신코가 경성극장을 직영 또는 반직영했다. 일본인이 주인인 체인극장에서의 내선일체 영화 상영은 무엇보다 민족 문화를 말살하는 데 큰 무기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즉 불가항력이란 말이 얼마나 불가항력적인가를 알아챘을 때 제국은 이미 우리 표현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었다. 제국이 황국식민화 이데올로기를 수 만 피트 필름에 담아 동시다발적으로 끊임없이 돌리고 되감는 과정. 시대의 광기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을지 않았을까. 책은 '제국의 영사기는 자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을 뚫고 지나가는 가공할 무력'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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