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동네 산책] 춘래불사춘 시대 봄내 춘천의 닭갈비 맛집은?

 전국의 음식거리<2> - 춘천명동닭갈비골목

1968년 형성된 춘천 명물 명동닭갈비골목

철판과 소금·간장·양념숯불닭갈비 등 다양

6남매 중 3명이 닭갈비 장사 ‘명동1번지’

 

춘래불사춘.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한나라 원제 때 오랑캐에게 시집간 왕소군의 심사를 후대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시로 표현한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에서 유래했다. 진영을 떠나 지금 우리 국민의 마음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카톡’이 울렸다. 지인이 갑자기 춘천행을 제안하는 톡이었다. 창밖에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차에 ‘훅’ 들어온 ‘벙개’라 얼떨결에 응했다. 기차 시간을 보니 마음이 급하다. 준비를 하는 둥 마는 둥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서 가까스로 경춘선 itx청춘을 잡아탔다.

 

차창 밖 가까운 눈발은 세상일처럼 어지럽게 흩날렸지만 멀리 원경에 쌓이는 눈은 차분했다. 세상일도 조용해지려면 멀리 차분하게 내리는 눈처럼 시간과 거리가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춘천행은 얼마만이던가. 서울서 불과 한 시간. 서울 시내 지하철 소요시간보다도 짧은 길인데 강원도라는 심리적 거리가 그간 발목을 잡았다.

 

춘천, 순우리말 봄내 옛 이름은 오근내

춘천역에서 바라본 춘천대교 .  선사유적을 품은 하중도와 연결된다 .

 

 

춘천을 순우리말로 봄내라고 부른다. 한자로 봄 춘(春), 내 천(川) 자를 쓰기에 따온 말이다. 봄의 강, 봄이 흐르는 고장이라는 의미로 치자면 봄내 춘천은 봄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춘천은 예부터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봄이 되면 북한강과 의암호 주변이 푸르게 변하며 꽃이 만발하는 지역이다. 이런 지역적 특징 때문에 ‘봄이 먼저 오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춘천 시민들은 지역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봄내 시민’, ‘봄내 축제’, ‘봄내길’ 등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춘천시청 시정 소식지 이름도 ‘봄내’다. 옛 지명인 오근내(烏斤乃)보다도 이제는 봄내가 더 많이 쓰인다. 오근내는 신라 문무왕 때 불렀던 춘천의 옛 이름이다. 춘천역사문화연구회는 고구려 때 불렀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춘천이란 지명은 1413년(태종 13)에 처음 등장했다.

 

서울에는 오근내란 이름을 가진 닭갈비 전문점이 있다. 용산 백빈건널목 근처 본점을 가진 ‘오근내닭갈비’다. 근처에 ‘오근내2닭갈비’가 있고 출점을 하면 순번을 붙이는데 오근내4는 없다. 한때 미쉐린가이드 빕구르망에 선정된 명불허전인 곳이다. 춘천산 생닭 다리살만 이용해 포를 떠서 손님 앞에서 자르는 것이 오근내의 특징이다. 다른 곳은 대부분 손질된 채로 나온다.

 

서울 명동 본 딴 춘천 명동은 닭갈비 명소

닭갈비 고장 춘천의 대표적 닭갈비 거리인 춘천명동닭갈비골목 입구 . [사진=한국관광공서]

 

 

닭갈비는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의 향토음식이다. 춘천은 닭갈비 고장답게 ‘춘천명동닭갈비골목’이라는 1968년에 조성된 특화거리가 있다. 말 그대로 명동에 있다. 춘천 명동은 서울 명동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1960~70년대 춘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중심가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를 의미한다. 요즘은 점포임대 플래카드가 곧잘 눈에 띄고 예전만큼 번화하지 않지만 그나마 춘천명동닭갈비골목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이곳은 닭갈비 전문점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여러 점포가 몰려있다. 우미닭갈비, 명동골목닭갈비, 명동1번지닭갈비, 빨강머리이모닭갈비, 명동산골닭갈비, 구미닭갈비, Hwang’s도깨비집숯닭갈비, 유미닭갈비, 혜정닭갈비, 춘천중앙닭갈비, 춘천본가닭갈비, 대청봉숯불닭갈비, 고려닭갈비, 원조남촌닭갈비 등이 자체 단체도 결성하고 분투하고 있다.

 

춘천 닭갈비 유명세의 든든한 뒷배는 양계산업

춘천이 닭갈비로 유명세를 탄 이유에는 지역 양계 산업이 든든하게 받쳐줘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닭갈비 문화 덕분에 닭 소비량이 많아지자 양계산업도 발달했다고 하지만 양계가 많아서 닭갈비 식문화가 발달했다고 보는 것이 순서상 맞다.

 

닭갈비가 처음 개발된 때는 1960년대 초반 춘천 중앙로에서 돼지고기를 팔던 김영석 씨로 알려져 있다. 한 날은 돼지고기가 떨어지자 급히 닭 두 마리를 사다가 양념구이를 한 것이 반응이 좋았다. 이후 김 씨는 닭을 돼지갈비처럼 포를 떠서 양념해 재웠다 구이로 선보였고 닭갈비 시초가 됐다.

 

당시 춘천지역에는 양계장이 많았다. 춘천은 강원도 내륙 지역으로 비교적 넓은 토지와 깨끗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런 조건은 양계 농장을 운영하기에 적합하고 가금류 전염병 관리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춘천은 오래전부터 양계 농가가 많고 닭고기 가공업도 발전했다. 경춘선으로 대변되는 관광산업과 연계되면서 관광객들이 닭갈비를 찾고 소비가 증가하면서 양계산업 성장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다.

 

닭갈비 골목으로 유명해진 춘천 명동거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을 위한 작은 식당들이 있던 골목이었다. 그중 2~3군데 식당에서 싼 가격에 닭갈비를 판매하던 것이 80년대에 들어서 점점 유명해지더니 지금의 닭갈비 골목이 형성됐다. 처음엔 숯불구이였던 것이 철판에 각종 채소와 매콤한 양념을 넣고 볶아 먹는 철판양념닭갈비로 변주가 생겨났다.

 

골목 가득 닭갈비 굽는 냄새 진동

춘천명동닭갈비골목을 채우고 있는 닭갈비전문점 간판 .

 

 

춘천역 1번 출구서 중앙로로터리로 10여분을 걸으면 닭갈비골목 입구가 나온다. 여름 주말 저녁 골목에 들어서면 닭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골목 가장 첫째 집 우미닭갈비가 나온다. 개업 55주년의 업력을 가진 곳으로 닭갈비 판을 깨끗이 물로 씻어내는 불판세척실을 따로 두고 있다. 이는 맛은 기본이고 위생을 앞세워 식객을 끌어들이겠다는 일종의 마케팅 포인트다.

 

유미닭갈비는 매콤한 양념으로 볶는 철판닭갈비와 숯불닭갈비 두 가지 조리법을 모두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숯불은 양념, 간장, 소금 세 가지 맛을 즐길 수 있어서 다양한 맛을 즐기는 식객들에게 인기가 좋다.

 

춘천본가닭갈비는 3대가 50년을 훌쩍 넘게 이어오는 점포다. 신선한 계육만 사용하고 김치는 직접 담가서 내놓는다. 이곳 역시 숯불과 철판 닭요리를 모두 맛볼 수 있다. 메뉴 중 모둠삼색닭갈비가 인기가 좋은 데 이는 다름 아닌 양념, 간장, 소금구이 세 가지 맛을 뜻한다. 네이밍으로 식객의 입맛을 자극하는 나름 통하는 마케팅이다.

 

원조중앙닭갈비(간판은 이송금할머니의 춘천중앙닭갈비)는 ‘SINCE 1960년’이라고 써 붙여 놓고 은근 이 골목 터주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대를 잇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 맛이 일품인 곳이다. 이곳 역시 이송금 할머니에 이어 2대째 이어져 오는 노포다.

 

자가제면 막국수 투박한 ‘강원도의 맛’

명동 1 번지닭갈비의 닭갈비와 막국수 .

 

필자는 이날 닭갈비 골목 중간쯤 위치한 ‘명동1번지닭갈비’를 방문했다. 이 식당은 ‘춘천명동닭갈비 골목에서 식도락 여행객들이 즐겨 먹는 닭갈비와 막국수의 최고의 맛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고유한 양념과 요리법을 가진 맛있는 닭갈비와 막국수를 주 메뉴로 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특히 ‘닭갈비와 함께 곁들여 먹는 막국수는 메밀로 반죽하여 직접 뽑은 면을 사용합니다. 5남 1녀 가족 중 3명이 닭갈비가게를 운영하는 닭갈비 가족’이라는 홍보는 면을 좋아하는 식객의 구미를 한껏 당기게 했다. 명동1번지닭갈비는 농가와 직거래하는 춘천닭갈비협회의 고기를 사용한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눈발이 잦아졌다. 일행과 춘천명동지하상가와 춘천중앙시장을 둘러봤다. 칼국수면과 소면을 사려고 요선시장에 있던 요선제면에 들리려 했지만 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 춘천중앙시장에서 황소표국수에서 칼국수면을 한 묶음 사 왔다. 며칠 후 마침 멸치 다신 물이 있어 감자 좀 썰어 넣고 칼국수를 끓였는데 면이 윤기 있고 쫄깃한 게 식감이 참 좋았다. 춘천행 ‘벙개’의 소소한 전리품이다.

2024. 12. 13. 11:18

[유성호의 미각 여행] 박수근의 따뜻한 시선이 스민 창신동 갈빗집

신세계서 창신동까지 박수근 로드 답사

문구도매골목 한쪽 수줍은 듯 숨은 맛집

진짜 돼지갈비만 파는 고깃집 동문갈비

 

미석(美石). 화가 박수근(1914-1965)의 호다. 예술적 철학을 표현하고 삶의 단단함과 그림의 서민적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해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932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조선미술전람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같은 관전(官展)에 출품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광복 이전에는 주로 농가 풍경과 여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러한 모티프를 일관되게 이어오다가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어렵게 생활하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똬리를 튼 그에게 거리 풍경과 서민들의 일상은 작품의 주된 소재가 됐다. 화면에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화강암과 같은 질감을 내는 그의 화풍은 매우 독자적이고 창의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미석이란 호는 작품 스타일과 그의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박수근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화가다. 반대로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수근은 미술사가들이나 비평가들에 의해 해석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수근이란 틀에서 벗어나 그의 일생과 작품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있었다.

 

신세계~창신동 집터까지 예술다양성 답사

답사 중간에 들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2 층 한은갤러리 .  현재  ‘ 사유와 산책 - 이어진 길 ’ 이란 주제로 소장품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다 .

 

예술전문지 데일리아트 한이수 대표가 지난달 30일 박수근이 활동했던 신세계백화점 본점(신세계스퀘어)부터 종로구 창신동 집터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예술 다양성에 대한 답사를 이끌었다. 신세계백화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미츠코시 경성지점으로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해방 후 동화백화점이었다가 한국전쟁 때는 미군 PX로 사용됐다. 1963년부터 신세계백화점으로 개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건축가이자 소설가 이상의 작품 '날개', 여류 소설가 박완서의 나목에도 등장하는 주요한 글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이름이 외자라 경아라 불림)은 미8PX 초상화부 점원이다. 화가 옥희도는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경과 옥희도는 서로에게 연정을 품었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경은 결혼 후 두 자녀를 낳고 살다가 어느 날 옥희도의 유작전 기사를 보고 전시회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옛날 옥희도의 집에서 봤던 그림이 고목이 아닌 나목이란 사실을 알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박완서는 나목헌사에서 이 소설은 내가 사랑했던 한 화가의 삶을 더듬어본 것이다.’라고 적었다. 두 사람은 실제 1951년 겨울 미8PX에서 처음 만난다. 로맨스가 있었는지는 고인이 된 두 사람만이 알 일이다.

 

지난 2021년 겨울부터 20243월 봄까지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의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전시회 추억이 소환된다. 전시회에는 회화 작품 수 100여 점과 자료 200여 점 등이 나와 박수근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 당시 필자는 세 차례나 전시회를 찾아 감동을 덧쌓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나목은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참혹한 시대에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간 사람들,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 찬란한 예술을 꽃피운 박수근을 상징한다.

 

나무는 곤궁을 이겨낸 화가 상징

박수근의 ‘창신동기와집’(1956년 작)[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수근은 12세 때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면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박수근은 초등학교 담임인 오득영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면서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고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박수근은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하면서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국전, 대한미술협회전, 현대작가초대미술전 등 중요 전람회에 참여하면서 중견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대 학출도 아니고 당시 유행하는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지만 진솔한 소재를 선택하고 개성 있는 화법을 구사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한이수 대표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그림만 그리며 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고 용산 미군부대에서 전시를 열고 그림을 팔았다라고 설명했다. 미국 개인전을 제안받고 열심히 준비했지만 병으로 갑자기 타계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PX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박완서가 훗날 소설가가 되어 박수근이 참혹한 시절을 얼마나 묵묵히 견뎌냈는가를 기록한 것이 나목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박수근은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전쟁 전 강원도 양구는 38도선 이북이었다. 종로구 창신동에 정착한 10년 동안은 그가 화가로서 가장 전성기를 누린 시간이었다. 판잣집이 즐비한 창신동 골목길은 좁고 시끄러웠지만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이때 그린 창신동 기와집은 그가 살던 창신동 집을 포대종이 위에 연필과 크레용을 사용해 그린 사실적 작품이다.

 

비평가들은 이 당시 박수근의 그림에 대해 참혹한 전쟁이 지나가고 폐허가 된 서울에서 강인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이웃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림에 새겨 넣었다고 표현했다. 비평가들은 박수근을 서양의 유화를 한국적으로 잘 해석한 화가라는 평가도 했다. 답사팀은 2층 높이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는 롯데호텔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과거 반도호텔과 그 안에 반도화랑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반도화랑을 통해 박수근의 작품을 구매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창신동의 시장 풍경과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 시장을 오가는 여인들, 휴식을 취하는 노인 모습 등 전후 서울살이에 고단한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그는 그림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는 온화한 색조,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시선 등에서 대상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애정을 담았다. 답사팀은 박수근 집터와 그가 다녔던 동신교회, 그리고 여전히 1950년대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창신동 뒷골목을 누비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필자가 두 번에 걸쳐 사전 답사한 동문갈비로 향했다.

 

동대문 밖 첫 동네 창신동 돼지갈비 맛집

동문갈비의 돼지갈비, 동태탕, 된장찌개와 다양한 밑반찬.

 

동문갈비 상호는 말 그대로 동쪽 문’, 즉 동대문 쪽에 있는 갈빗집이란 의미다. 동문갈비가 있는 창신동은 동대문 밖 첫 동네다. 문구도매상가가 밀집해 있는 골목 안쪽에 보일락 말락 부끄러운 듯 동문갈비가 들어서 있다. 처음 찾을 때는 살짝 헤맬 수도 있는 골목 구조다.

 

일단 이 식당은 알려주기 싫은 숨은 맛집이다. 네이버 스마트플레이스 리뷰가 극히 적어 맛이 없는 곳인가 싶겠지만 접해 보면 신세계다. 초로의 부부가 다정하게 운영하는 곳이다. 홀과 숯불을 담당하는 남 사장님은 주방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여 사장님이 오순도순 장사를 하신다. 홀 한 구석에는 해병대231기서울동기회빨간색 목간판이 서있다. 남 사장님이 1970231기로 해병대를 입대했다고 한다.

 

종업원이 따로 없기에 바쁠 때는 손님들이 눈치껏 무상 알바를 해야 한다. 신세계에서 창신동까지 예술다양성 답사 후 식후경하기 위해 맛을 보고 예약도 할 겸 사전 답사도 두 번 하고 답사 당일까지 총 세 번을 다녀왔다. 첫날은 돼지갈비가 떨어져 동태탕을 먹었다. 없는 메뉴도 해 달라고 하면 가능하고 모든 반찬을 직접 만들어서 자주 바꿔주니 집밥 대접 느낌을 받는 곳이다.

돼지갈비는 간이 심심한 것이 오래전 접했던 원조 양념 맛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찾아 헤맨 맛이던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갈비 붙은 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구리 부위도 있지만 돼지갈비 판다고 써놓고 접착갈비나 목살을 내놓는 곳에 비하면 돼갈천국이다. 게다가 가격이 비현실적 실화인 1인분 300g 15000원이아리! 가성비가 갑 오브 갑이다.

 

밑반찬도 경기 음식 기반으로 차분하고 맛깔스럽다. 여 사장님 고향이 경기도 용인이다. 그래서 간이 세지 않다. 경기 음식은 과거부터 궁중음식이 확산돼 맛이 구축된지라 고급진 맛도 있다. 물은 생수병의 찬물은 물론 따뜻한 주전자 숭늉을 제공해 겨울 식객의 언 손을 녹여준다.

 

넉넉한 인심과 친절, 맛있는 음식은 필자가 추구하는 좋은 가성비의 최고 맛집이다. 현재 자리에 정착한 지는 불과 3, 업력이 짧아 보이지만 이전에는 성북구에서 크게 음식점을 했다고 한다. 지금 양념돼지갈비 레시피는 그때 주방실장한테 배운 것이다.

 

이전에 갈비를 먹으러 갔으나 이틀간 휴무로 인해 재고가 없어서 동태탕을 먹었는데 그것도 만점이다. 점심식사는 동네 일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이모카세도 시전 한다. 구수한 청국장 베이스의 2000원짜리 된장찌개는 필수다. 공깃밥은 한 그릇 값에 양껏 퍼다 먹어도 눈치 주지 않는다. 박수근이 살면서 접했던 정과 따뜻한 시선이 머무는 느낌이 있는 공간이다.

2024. 11. 13. 06:17

[유성호의 맛있는 미각 여행] 대방어 계절 시즌 업!

단풍의 계절이 왔건만 색깔이 예전만 못하다. 비도 오고 일교차가 커야하는데 아직도 도시에는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시민들이 눈에 띌 정도로 기후변화 때문에 단풍이 완전치 못하다.

 

2020년 이 무렵 썼던 칼럼을 보면 연일 올라오는 설악산, 지리산, 내장산의 단풍은 도시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거대한 산은 여름이 남긴 녹색과 자연의 신비로운 변화인 선홍과 황금색이 울긋불긋 어우러진 황홀한 채색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거대한 자연과 변화무쌍한 색에 압도당한 눈은 고양이 눈처럼 동그랗게 커졌고 입에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엉덩이가 들썩이고 다리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고 적고 있다.

 

서울의 단풍은 창덕궁 후원이 갑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인원 통제와 시간제한 등 관람이 자유롭지 못해 발걸음 하는데 걸림이 된다. 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다. 바로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접해 있어서 단풍이 창덕궁 못지않게 수려하다.

 

특히 현 춘당지는 원래 창덕궁과 창경궁이 공유하는 후원 권역이었다. 일제는 춘당대 앞 친경적전(積田)을 하는 귄농장 자리에 창덕궁을 둘러싼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냇물을 모아 연못을 파고 춘당지라고 이름 붙였다.

 

관덕정 노루꼬리만한 단풍으로 만족

창경궁 춘당지를 내려다보는 관덕정 앞 단풍. 올해는 이 곳 단풍이 그중 가장 예쁘다.

 

창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세밀하게 그린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창경궁 춘당지 자리에 열한 배미의 논자리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농경지는 일제가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면서 사라지게 된다.

 

원래 옛날 춘당지는 창덕궁 쪽 절벽인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이었다. 지금은 담장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나뉘어 있는데 현재 소춘당지가 원래 옛날에 춘당지로 불린 곳이다. 일제가 내농포에 속한 11개 논을 하나의 연못으로 만들면서 생겨난 것을 지금은 춘당지(대춘당지)라고 부른다.

 

일제는 이곳에 놀잇배를 띄우고 주변 경관을 사쿠라(벚꽃)로 채웠다. 해방 후에도 온갖 놀이 시설이 들어섰고 1980년 대 들어서야 복원에 들어가 주변을 버드나무와 소나무 등 전통 수목으로 바꿨다. 그러나 여전히 내농포는 춘당지 속에 수몰돼 있다.

 

궁궐 후원에 논과 밭을 조성하고 군주가 친경의 모습을 보인 역사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례다. 이는 조선의 독자적인 궁궐 문화로 애민농본의 전형이다. 아울러 이미 오래전부터 궁궐에서 왕실의 주도로 다양한 농업 활동이 전개됐다는 점은 현대 도시농업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역사가 배어있는 창경궁 춘당지와 대온실 영역을 찾은 날, 가을이 꽤나 깊었다. ‘1011가 창경궁 단풍 피크인데 올해는 달랐다. 창경궁은 이미 창덕궁과 더불어 단풍 성지로 이름나 있다. 그래선지 11월초 찾은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창경궁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왕가박물관 터가 있다. 지금은 철거되고 남은 부재만 약간 쌓여있을 뿐 옛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이 지역도 개방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왕가박물관은 일제가 창경궁 명정전 일원에 식물원, 동물원을 지으면서 박물관도 함께 만들었다. 1911년에는 일본식 연와건물의 박물관 본관을 신축, 이듬해 낙성식을 가졌다. 박물관 본관은 이왕가박물관이 1938년 덕수궁의 이왕가 미술관으로 옮겨가면서 장서각으로 이용되다가 1992년 해체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창경궁은 춘당지 주변 단풍이 압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손명순 여사가 좋아했던 단풍이라고 한다. 춘당지 옆 큰 단풍나무 아래서는 나무를 올려다보고는 탄성을 터트릴 정도였다고 한다. 올해는 아직 단풍이 덜 든채 푸른 단풍나무가 즐비했고 일부는 색을 발하지 못하고 타들어간 모습이었어. 예전엔 그 자리서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붉은 별이 머리 위로 와락 쏟아지는 착각이 들 정도의 장관이었다고 적었었다.

 

대방어 11시즌 업’ 2월까지 제철

외관이 비슷한 대방어와 부시리는 입꼬리를 보면 구별이 쉽다 .  대방어는 직각 ,  부시리는 둥근 게 특징이다 .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인지라 경()을 했으니 마무리는 식()이다. 계절 별미인 방어 철이 다가오고 있어서 의견 일치를 봐서 메뉴를 방어회로 정했다. 방어는 11월부터 2월까지 산란을 위해 몸에 영양을 축적시킨다. 이 시기 방어가 가장 맛있는 이유다.

 

대방어는 일반적으로 9kg 이상 되는 대물을 말한다. 5kg까지를 소방어, 5~8kg 정도를 중방어라고 한다. 노량진수산시장 같은 곳에서 대방어를 고르는 방법은 몸매가 날렵한 것보다 배가 불룩한 것이 좋다. 그만큼 기름진 뱃살이 잘 발달했다는 증거다. 또 입 꼬리를 잘 살펴서 대방어와 부시리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대방어는 입 꼬리가 직각 모양, 부시리는 둥글게 발달했다.

 

방어는 다른 생선보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지질이 풍부하다. 칼슘, , , 나트륨, 칼륨 등 무기질도 함유돼 있고 DHAEPA, 타우린 등 기능성 물질이 많아 고혈압, 동맥경화, 심근경색, 혈전, 뇌졸중 등 질환을 예방하는 데 좋다.

 

특히 비타민D가 풍부한데, 이는 한국인에게 부족한 영양소 중 하나다. 식약처 조사 결과 우리나라 남성 86%, 여성 93%가 비타민D 결핍이다. 비타민D는 면역력 증가와 우울증 예방을 위해 꼭 필요한 필수 영양소다. 해가 짧은 겨울철에 특히 더 부족해지기 때문에 겨울 방어는 영양소이기도 하다.

 

깔끔하고 질서 정연한 담음새 혜화수산

혜화수산의 대방어는 종류별로 맛볼 수 있게 가지런히, 부위별로 담겨 나온다. 농어와 산낙지 등 다양한 수산물을 판다.

 

커다란 간판에 압도적인 큰 글씨의 혜화수산’. 비록 점포는 명륜동에 있지만 혜화수산이란 이름을 달았다. 명륜보다는 대학로가 있는 혜화가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창경궁 직원들은 혜화수산을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경궁에서 나와서 혜화동 로터리 쪽으로 걸어 올라오는 길에 회식을 할 만한 식당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혜화수산은 실내가 넓기 때문에 여럿이 오기 적당한 장점도 있다.

 

대방어가 날렵하게 해체된 채 접시에 차분히 담겨 나왔다. ‘혜화수산의 담음새(플레이팅) 특징은 가지런함에 있다. 방어는 물론 농어, 광어 등도 가지런히 질서 있고 보기 좋게 담아낸다. 특히 가마살, 배꼽살, 뱃살, 등살, 사잇살, 꼬리살 등 거의 전 부위 맛을 볼 수 있도록 골고루 담아 내오는 것이 특징이다.

 

분말을 갠 와사비가 나온다면 한 단계 위 와사비를 주문하면 가져다준다. 개인적 기호일 수 있지만 분말와사비보다는 알갱이가 조금 씹히는 생와사비가 낫다. 물론 진짜 고추냉이를 갈아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서울 대방어 대명사 바다회사랑

대방어 배꼽살 진수 맛보기 좋은 곳이지만 오랜 웨이팅을 감수해야 한다.

 

겨울 대방어 하면 손꼽히는 집이 또 있다. 전통의 강자 서교동과 연남동에 있는 바다회사랑이다. 한 겨울 웨이팅 지옥을 맛보고 싶다면 피크타임 때 바다회사랑을 가란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는 곳이다. 이곳의 특징은 둥그런 큰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탑처럼 쌓아주는 것이다.

 

커다란 레몬 슬라이스 두세 쪽을 대충 회 위에 올려서 내오는 것은 이 집의 트레이드마크다. 썰어 낸 회를 보면 압도적 크기의 대방어 살이다. 배꼽살의 경우 아삭하고 꼬들한 식감이 일품이다.

 

배꼽살은 대방어의 훈장 같은 부위다. 소방어, 중방어에서 느낄 수 없는 맛이기 때문이다. 밑반찬으로 내주는 마른김을 깔고 회 한점, 묵은지, , 날치알을 차례로 조합해서 싸 먹으면 별미 식사가 되기도 한다.

 

이달 말이면 제주도 모슬포항에서 최남단대방어축제가 열린다. 제주 현지를 가기로 약속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선지 방어가 물살을 거슬러 힘차게 서울로 향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대방어 벙개가 내심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