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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4 최초의 수퍼모델...
- 2006.12.3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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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들은 붓 끝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화가들이다. 그것도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화가들로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다. 그래서인지 더 자세히 알려고 하는 의지를 약하게 만드는 이름들이기도 하다. <조선의 화가>는 선비, 정승, 부자에 이어 '조선을 움직인 위대한 인물들' 연작 네 번째 소재로 시대를 풍미한 화가를 소개한 책이다. 두 명의 편저자는 책을 '보물과도 다름없는 선조들의 신비로운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편저자의 소개처럼 화가들의 그림은 실제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수두룩하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국보216호) <인왕제색도>(국보217호),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병>(국보 139호) <단원풍속도첩>(보물 527호) <단원화첩>(보물 782호),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이 있다. 또 공재 윤두서의 <윤두서상>(국보 240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80호) 등 일일이 나열이 힘들 정도다. 때문에 '보물과도 다름없는'이란 표현은 예술 혼까지 담은 것으로 읽혀진다. 조선의 아름다움을 그린 진경산수의 창시자. 정선의 소개말이다. 김홍도는 왕의 사랑을 받은 풍속화가로 소개되고 있다. 신윤복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필치로 담아냈고 사임당은 보석 같은 조선의 여류화가로 표현했다. 다소 생소한 최북은 붓으로 먹고 산 시대의 저항아, 김득신은 해학적이고 개성 있는 풍속화의 선두 화가라고 소개했다. <몽유도원도> 때문에 안견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화폭에 담았다고 예찬했다. 글씨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김정희, 새로운 시대 예술을 고민했던 윤두서는 선비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복을 빌고 화를 막아주는 서민들의 그림, 민화를 따로 소개하고 있다. 책에 소개되고 있는 화가들은 대체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이들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민족적 고통을 거치면서 예술분야가 발전했는데, 특히 회화 분야에서 괄목했다고 편저자들은 분석했다.
말술을 즐겼고 자신에게 해를 입히면 반드시 모진 앙갚음으로 되돌려 주는 등 강퍅한 마을 가진 그은 말년에 남의 집 살이를 하다가 눈 오는 날 만취해 성곽 구석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최산수'라고 불릴 정도로 산수화에 능했다. 약 120여점의 산수화를 남겼는데 <풍설야귀인> <여름날의 낚시> 등이 대표작이다. 손가락을 이용해 그린 그림을 지두작(指頭作)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그린 <게와 갈대>는 날카롭고 강한 최북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국가검정 미술교과서의 표지로 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김득신의 <파적도>. 한가로운 봄날 앞마당의 평화를 고양이가 깨트린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다른 이름으로 <야묘도추>라고도 한다. 그림은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봄볕이 따뜻하게 등솔기를 덥히고 마당의 병아리들은 평화롭게 모이를 쪼고 있는데 난데없이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적막을 깬다. 병아리 한 마리를 덥석 물고 달아나는 것이다.
나머지 병아리들은 혼비백산하고 어미닭은 모성본능을 앞세우지만 속도감이 없고 고양이와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어느 누구의 사정권에서도 벗어난 고양이는 여유 있게 뒤돌아보면서 상황을 은근히 즐기는 듯하다. 실제로 그림을 자세히 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을 쳐다보는 고양이가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찰나의 시간을 화폭에 완벽하게 잡아 둔 그림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조선 후기 풍속화의 특징인 해학을 듬뿍 담고서. 편저자들은 그림 전공을 하지 않은 작가들이다. 지금까지 나온 4권의 <조선을 움직인~> 시리즈를 모두 편저했다. 흩어져 있는 글을 주제에 맞춰 한 곳에 모아 엮는 것도 좋은 출판기획 아이디어다. 창작의 고통은 덜하겠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에 점수를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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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26. 15:23
부평삼변과 가족사 4...
2007. 1. 26. 15:23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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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삼변의 맏형 산강재(山康齋) 변영만(卞榮晩)을 표현하는 수식어들이다. 화려한 수식어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 학문이 능했기 때문에 수식하는 말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박학다식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가 천재성을 발휘해 전문가 반열에 올라선 분야만 어림잡아도 예닐곱 가지가 된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의 학문적 천착은 실로 대단하다. 그가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야에다 호칭을 붙이면 한학자(국학), 문학가, 불교연구가, 법률가, 교육자, 항일운동가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특히 언어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여줬는데 영어와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했다고 한다. 인적 교류 역시 그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듯 하다. 그가 교류했던 지인들 면면을 살펴보면 격동하는 제국의 근대사를 느낄 수 있다. 이름만대면 알만한 굵직한 인물들이 변영만과 어깨를 겯고 우리 곁을 지나간다. 신채호, 정인보, 한용운, 안창호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이자 지성인들과 깊은 교우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단재 신채호와 학문적 교류...법관으로 사회 진출 고종 26년인 1889년 6월 23일 경기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신채호와 같이 수학하며 교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만열 전 국사편판위원장이 정리한 신채호에 대한 행적을 살펴보면 "19세 때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그곳에서 변영만과 같은 벗들을 사귀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학문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성균관장이던 이종원(李鍾元)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신채호의 성균관 수학을 기준하면 변영만은 10대 초반에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15세가 되던 해 이철자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둔다. 상수와 정희다. 정희가 손위다. 필자의 할머니다. 출가해 4형제를 뒀다. 상수는 1남 7녀의 자손을 둔다. 부평 향제에 맏손자 호달씨가 살고 있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해 이듬해 졸업한 그는 그해 12월 판사로 임용된다. 첫 임지는 목포구재판소 판사. 이후 1908년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가려고 하자 더 이상 판사 노릇을 할 수 없다며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나선다. 그는 1910년 2월 한성변호사회로부터 매우 중요한 결정사항을 통보받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안중근 의사의 변호사(추가)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그의 애국심의 외적평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안 의사 측은 평양변호사 출신 안병찬(安秉瓚)에게 변호를 맡겼다. 이후 1912년 중국으로 넘어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변호사로서 기자생활을 했다. 1914년 중국공사가 총독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문건을 보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사에 입사해 배일(排日) 기사를 게재하고 각지의 불평조선인(항일인사)에게 배포하고 있다'고 그의 항일 활동을 그리고 있다. 안중근 변호사로 결정됐지만 일본 불허로 변호 못해 1918년에 중국에서 돌아와 1920년대 <동명>, 1930년대 <동아일보> 등에 글을 남겼다. 당시 그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는 재미난 기사가 있다. 김동환에 의해 1929년 창간된 대중잡지 <삼천리> 제5권 제3호(1933.3월 발행)에 안재좌(安在左)가 쓴 '新舊文人 언파레트...續'이란 평론을 보면 변영만에 대해 '키가 간신히 왜소를 면하였으나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OO씨는 얼굴이 허여멀건 분이나 변씨는 그렇지 못한 분이었다'고 외관을 평한 부분이 나온다. 또 문장(글)에 관해서는 '변씨는 수필, 잡문, 최근에는 소설까지 쓰시는데, 이렇다 할 작품은 하나도 없으나 만문(수필) 같은 것을 보면 함미(鹹味)가 지나서 산미(酸味)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외국 문학에 박학이신 것은 수필, 잡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동시에 함미가 지나서 산미가 있는 것이 많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평이다. 왜냐면 안재좌는 글 말미에 변영만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없고 먼발치에서만 본적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안씨는 변영만의 문학세계를 평가할만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변영만은 성격 중 최대 결함과 그것을 고치기 위한 노력에 대해 말해달라는 한 잡지사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의 성격 중에는 악인에 대하여 표면상으로는 준열(峻烈)히 공격을 가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그다지 미워할 줄 모르는 결점이 있오. 그러나 그대로 가지고 지나려 하오" 이같은 그의 생각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오래전 지냈던 판사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 서울대 중문과 강사,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명륜전문학교교장, 성균관대교수를 거쳐 1952년에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을 지냈다. 종교는 무교, 취미는 등산이고 즐기는 일은 독서 후 감상이라고 했다. 1954년 눈을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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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매년 여름방학이면 텐트를 싸들고 찾았던 곳이 한탄강 유원지다. 고등학교 때는 텐트 하나를 쳐 놓고 연인원 20여 명의 친구들이 보름간을 오가며 청춘을 보냈던 곳이다. 그리고 경기문화재단과 연천문화원에서 전곡리구석기축제를 주관하기 전에 '전곡포럼'이란 민간단체인 대회를 꾸려왔는데, 그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했던 추억이 새록하다. 배기동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임근우 교수(강원대 미대), 안성길 대표 등이 주축이 된 이 단체(전곡포럼)에서는 매년 5월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축제를 열어왔다. 몇 주 전부터 그곳을 오가며 설치미술작품을 만들거나 유물전시관을 정비하곤 했다. 10월에는 개천제례를 열기도 했다. 게다가 군 생활도 한탄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전곡에서 하다 보니 인연이 참 많은 곳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뇌리에 깊이 박힌 이름이 <한탄강>이란 제목을 가진 책을 고르게 했다. 책 표지에는 역사와 예술혼, 생명을 품은 큰여울의 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짧은 소개말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여지게 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한반도 최고의 길지 따지자면 그곳은 한반도 최고의 길지였다. 27만여 년 전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조상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검증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셈이다. 한반도의 유일한 화산강이란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곳, 저자는 한탄강에 있는 분단의 역사와 선사시대 흔적, 예술, 그리고 천혜의 자연환경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록으로 남겼다. 한탄강(漢灘江)의 한은 '크다'는 뜻의 우리말이다. 탄은 우리말로 여울, 개천이란 뜻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한탄이 아니라 대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한탄강 일부 구간을 대탄강으로 표기한다. 이는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를 통해 새롭게 밝혀낸 성과라고 한다.
한탄강은 임진강만큼 분단의 역사를 안고 흐르고 있다. 금강산 아래 장암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북녘 땅 소망을 담아 철책 밑으로 남한으로 흐른다. 한탄강의 또 다른 이름인 '한이 서린 탄식의 강'은 한국전쟁에서 흘린 동족의 피를 두고 한 말이다. 저자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인용, '국민과 함께 이기는 전쟁만이 승리한 전쟁'이라며 전쟁의 의미를 묻고 있다. 강물 따라 예술은 흐르는데 댐 건설로 '몸살' 저자의 발길은 분단과 역사를 넘어 예술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한석봉의 일필이 휘날리고 겸재의 붓끝에 기암괴석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한탄강의 지천인 영평천에 있는 수직 단애 창옥병 강가 바위에 새겨진 한석봉의 글씨는 필체의 웅혼함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松筠節操 水月精神(송균절조 수월정신) 1583년 율곡 탄핵문제와 관련해 박순이 부당함을 지적하자 삼사에서 그를 역탄핵해 조정이 시끄럽자 선조가 박순을 헐뜯는 자를 변경으로 유배 보내면서 내린 하교 내용으로 전해진다.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와 지조, 물과 달 같이 깨끗한 선비 정신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박순이 창복병에 살 때 한석봉이 글을 쓰고 석공 신이가 새긴 글씨인데, 한탄강에는 이 같은 암각문이 수도 없이 많다. 저자의 발길은 어느새 한탄강의 주상절리 수직 단애 앞에 멈춰 서 있다. 화산지형의 특징인 주상절리는 현무암이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바위가 절리면을 따라 덩어리째 떨어져 나가면서 만들어진 것. 단애 아래로 흐르는 강물에는 한반도 고유어종만 천연기념물 어름치를 비롯해 쉬리, 납자루, 돌마자, 꺽지 등 16종이 서식한다. 자연환경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인 셈이다. 그런 한탄강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연천, 파주 일원에 홍수가 나자 정부가 1999년 임진강홍수대책 일환으로 한탄강댐 건설을 발표, 인근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발을 야기한 것이다. 이후 소강상태를 벌이다가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중재안을 내놓았는데, 건교부와 주민 양측에서 비토됐다. 그러다가 2006년 7월 정부가 한탄강댐을 건설하겠다고 전격 발표, 또다시 주민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화산지대에 댐을 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과학적 근거를 앞세워 댐 건설의 폐해를 들고 나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저자가 댐 건설과 관련해 25쪽을 할여해 주민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았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은 정춘근 시인의 <한탄강은 흘러야 한다>로 장식했다. 시의 끝 소절이 인상적이다. (전략) 내가 서있는 자리/다시 아들 딸들이 서서/천년 만년 막힘 없이/이 땅에 푸른 동맥으로/한탄강은 흘러야 한다 있어야 할 곳에 꼭 필요한 사진을 배치함에서 편집 감각을 한껏 살린 책이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쯤 읽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신문사 정치부 데스크인 저자가 문화부에 있을 때 2005년 기획시리즈 '한반도의 보고 한탄강'을 엮은 것이다. 이 시리즈로 저자는 제22회 최은희여기자상과 같은 해 수원시 문화상(언론부문)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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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26. 01:31
토봉ㆍ일봉보다 멋진 따봉 할머니
2007. 1. 26. 01:31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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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봉 지난 1월 20일, 절기상 큰 추위가 있다는 대한(大寒)이다. 지구온난화 영향인지 아니면 봉사의 손길을 보살핌인지 날이 그다지 춥지 않다. 토봉(토요봉사대) 일꾼 20여명은 이른 아침 우이동길 한 골목 안에 사시는 김경옥(78) 할머니댁을 찾았다. 이미 선발대가 지난주 공사할 곳을 봐두고 온 터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맞아주시는 할머니. 허리디스크와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해야 걸음을 뗄 수 있다. 좁디좁은 방이지만 몸을 녹이라고 연신 손짓을 하며 들어오라고 성화다. 방에 들어서자 고개를 세울 수 없는 키 낮은 천장이 손님을 맞는다. 기다렸던 손주처럼 봉사대에게 과자, 귤 등 먹을거리를 내놓는 할머니 손길에 콧날 찡하다.
시유지 위에 지어진 전세 500만원짜리 무허가 판잣집. 할머니는 봉사자들이 공구를 들고 일어나자 손사래를 친다. 추위도 다 갔고 하니 당신 집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달라고. 도봉노인종합사회복지관 재가복지담당 유버들씨는 "보증금 50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드릴 테니 집을 옮기시라고 했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며 한사코 거절하신 할머님"이라고 소개했다. 한마디로 '따봉 할머니'다. 따봉 할머니,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라" 토봉팀은 합판과 스티로폼으로 사방 벽에 방한공사를 새롭게 했다. 이 분야 전문가부터 처음 봉사대에 합류한 완전초보까지, 일의 속도는 다르지만 마음 씀씀이는 한가지인 이들이 손에 손을 보탰다. 한쪽에선 합판을 자르고 다른 쪽에선 벽에 틀을 박고 스티로폼을 세워 바람을 막았다. 합판으로 마감을 하면 그 위에 벽지를 발라 깔끔한 마무리를 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부엌살림과 냉장고를 닦고 한 청년은 너덜거리던 화장실 문을 뜯어내고 튼튼한 새것으로 바꿔달고 있었다. 한 쪽에선 멋진 데이트를 반납하고 여자친구와 봉사로 보람된 하루를 보내는 청년과 자매가 도란거리고 있었다. 이들의 환한 모습이 햇살처럼 아름다웠다. 그 사이 할머니는 '쉬어가며 먹어가며 해라. 추운데 몸 좀 녹이라'며 손주 달래듯 따뜻한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딸네 집을 다니러간 같이 사는 80세 된 '언니할머니'에게 자랑거리가 생겼다며 오랜만에 외풍 없는 훈훈한 밤을 맞았다. 돌아가는 발길을 멀리까지 배웅 나오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신 '따봉 할머니'. 외려 토봉 대원들이 위로받은 하루였다. 같은 시간 토봉의 또 다른 팀은 변순순(72) 할머니 집으로 출동했다. 조손세대로 할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와병중이다. 중1·고1인 2명의 손자를 건사하고 바라보며 사시는 할머니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할머니가 원하신 싱크대와 손주들의 책상을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으시는 할머니. 어깨에 실린 짐이 하루빨리 가벼워지는 축복을 기원했다. 일봉
그런데 문제는 집에 보일러가 없다는 것이다. 냉골에서 온전히 겨울을 나신 것이다. 도시락배달 봉사를 하는 김승진(39)씨는 "평일에는 복지관에서 나오는 점심 한 끼로 하루를 지내며 주일날에는 도시락 봉사대가 전해주는 도시락에 의지하는 분"이라며 "보일러를 놔드리고 싶은 마음에 SOS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건축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일봉팀. 할아버지 댁에 최첨단 전기 온수 보일러를 설치했다. 두어 시간 공사 끝에 보일러를 돌리자 3평짜리 방에는 훈기가 돌았다. 조금 더 있자 '지져도' 될 만큼 뜨끈뜨끈해진다. 일봉 역시 할아버지께 감동을 받아서 예정보다 일을 크게 벌인다.
예정보다 항상 커지는 공사... "감동 때문에" 일봉 팀은 서둘러 장소를 옮겨 도봉구 서원아파트 뒤편에 사는 정태율(80)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이 집 역시 창문이 허술해 보온이 안돼서 2중창으로 교체하고 전기공사를 새롭게 했다. 여성들은 주방과 가재도구를 닦고 할아버지를 위로해 드렸다. 봉사대원인 박상수(40)씨는 "겸손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할머니, 할아버님으로부터 오히려 많은 위로를 받는다"면서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면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토봉과 일봉팀은 기독교 봉사단체인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소속의 자발적인 구호봉사팀이다. 이들은 매월 1회 토·일요일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웃들을 돕고 있다. 봉사단의 본부는 서울광염교회에 두고 있으며 이 교회는 구제선교장학기금으로 지난해 33억5593만원을 지출했다. 이는 총 예산 59억7183만원의 56.2%에 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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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삼변과 가족사 3...
2007. 1. 20. 23:42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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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만(卞榮晩)·영태(榮泰)·영로(榮魯) 3형제를 일컫는 부평삼변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됐을까. 이는 중국 북송시대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삼부자를 일컬어 삼소(三蘇)라고 했는데, 변씨 형제도 그와 비견되는 천재성을 가진 명문장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평삼변은 삼화부윤 지낸 변정상의 아들
<고종실록>에는 고종 39년(1902)에 외부 참서관이던 그를 경흥감리 겸 경흥부윤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고종은 재위 43년(1906) 4월 정3품이던 그를 삼화감리에 임용하고 주임관 4등에 서임했다. 같은 해 10월에 다시 삼화부윤과 주임관 2등에 임용하는 등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는 고종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구한말 1909년(융희3년)에 쓰여진 <궁중차석>에는 중추원 부찬의(주임관 3등) 관직에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 관직에 있던 터라 기록이 적잖았다. <조선왕조실록(고종편)> <관보> <일성록> <승정원일기> 각종 궁내부문서 등에서 변정상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중추원 부찬의로 짐작된다. 1908년(융희2년) 중추원 부찬의 이인직이 신병으로 직무수행이 어려워 물러난 자리를 채운 것이다. 과거로 출사해 승승장구... 한일합방 직전 사직 중추원 부찬의 자리는 삼화부윤 다음에 임용된 것으로 을사오적인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이 1908년 3월에 기안해 궁내부에 올린 것이다.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머리가 쭈뼛이 서고 소름이 돋았다. 친일파의 가장 앞잡이이던 이완용이 천거한 것인가? 그렇다면 혹시 같은 친일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를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명단에 없었다. 연구소 유은호 상임연구원은 "친일파로 분류된 자들은 국권을 빼앗긴 한일합방(1910) 이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속해 있던 자들"이라고 설명했다. 산강재 변영만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을 것이란 기우(杞憂) 이후에 또 한번 마음 졸였던 순간이었다. 하기야 변정상이 친일파였다면 어떻게 변영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니 왜 삼화부윤이란 직책으로 그를 소개하는지 이해할만 했다. 중추원 부찬의는 자칫 친일파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찾은 것이지만 1897년 3월에 발행된 대조선독립협회회보 9호에는 독립협회에 보조금(후원금)을 낸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정상은 효성도 지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흥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1896년 각의(閣議)에 의원면직서를 제출한다. 이유는 '부친 병 구환'이었다. 그의 뜻을 내각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받아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보낸 것이다. 김홍집은 그의 뜻대로 흥양군수 직을 1월 31일부로 면직하지만 2월 3일자로 다시 강령군수로 발령을 낸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변 군수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변정상은 과거에 급제해 등용한 후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뼈를 묻고자 했던 공직을 홀연히 떠난다. 부평삼변 3형제 등 모두 7남매 다복한 가정 친일은 하지 않겠다는 그의 뜻이라고 짐작될 뿐. 부평삼변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반일, 항일의 의지를 가슴 속에서 불태웠을지 모른다. 삼형제의 항일 행적은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장남 변영만 위로 누나 둘이 있고 영태와 영로 사이에 딸, 그리고 경임이 막내인 것이다. 딸들에 대한 기록을 더 없을까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첫째 또는 둘째딸로 추정되는 영하(榮河)에 대한 기록은 우연치 않게 찾게 됐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가 펴낸 <안동교회 90년사>(2001)에서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안동교회에서 권사로 끝으로 재직한 영하 여사는 '변영태의 누나'로 소개되고 있다. "때마침 교회에서 수고하시던 변영하 전도부인(전 외무부장관 변영태 씨의 누님)이 연로하셔서 사표를 내시고 전도부인이 계시지 않았다."(164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삼화부윤 변정상의 3남 2녀를 확인했다. 더 이상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변영로와 제일 큰 누나와는 18년 터울이 났다. 이는 변영로가 태어날 무렵에 시집을 갔을 나이란 의미다. 이름만이라도 알면 어렵지만 일말의 희망을 갖고 찾을 수 있으련만. 세기가 바뀐 지금, 그들 가족을 한 자리에 모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접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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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17. 17:07
부평삼변과 가족사 2...
2007. 1. 17. 17:07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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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만(卞榮晩)·영태(榮泰)·영로(榮魯) 3형제가 현대사에 남긴 업적과 자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터넷만 뒤지더라도 수없이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정보는 다양하고 흥미롭다. 지식의 경계 또한 넓고 해박하다. 세 천재의 행적을 좇다보면 어느새 격동의 현대사 속으로 빨려드는 듯 하다. 산강재, 전집발간·학술대회 등 조명 활발
2006년 6월 전집 발간을 기념해 인천시 구월동 인천문화재단에서 '근대 문명과 산강 변영만'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산강재의 인물관, 문명관, 문장관 등 방대한 학술자료와 1910년대 해외행적 등이 발표됐다. 산강재에 대해 활발히 재조명하는 이정표가 된 학술대회였다. 이 학술대회를 누구보다 반기고 자랑스러워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산강재의 종손 변호달 선생이다. 부평삼변의 향제(鄕制, 옛 고향)인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을 지키고 있는 선생의 감회는 남달랐다. 학술대회를 개최한 사실을 아느냐고 묻는 선생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소리지만 기쁨이 묻어났다. 어렵사리 전화한 마음을 아셨는지 선생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선생은 먼저 당신의 고모, 다시 말해 나의 할머니 정희 여사의 존재를 확실히 확인시켜 주었다. 단 한번도 그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할머니가 저벅거리며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오는 듯 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빚은 잃어버린 역사의 연결고리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시집을 오기 전에 이미 친정에 가 있던 터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유다. 이 때문에 어머니조차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소간 이쪽저쪽에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일 뿐이다. 백부 역시 1994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에 대한 역사는 점점 희박해져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선생이 가진 '기억 자료'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고모라지만 같이 살지 않았고 선생 또한 어린 나이였기에 흐릿한 기억 몇 조각만 파편처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선생의 고종사촌인 나의 작은 숙부에 대한 기억 한 자락을 전했다. 공통된 삶의 철학·개성 있는 삶 그릴터
선생은 50여년 만에 어머니를 대신해 숙부의 안위를 물었다. 혈육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숙부가 느껴야할 남다른 감회를 고스란히 대신 느낀 것이다. 선생은 숙부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직접 연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세월이 주는 서먹함일 뿐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아무래도 다른 이들보다 할아버지인 산강재에 대한 기억이 많았다. 일석과 수주에 대한 것은 고모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작았다. 산강재와 관련해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난 사실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얽힌 일화다. 이승만 정부가 조각(組閣)을 위해 인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산강재에게 법무장관을 맡아 줄 것을 청했다. 이때 산강재가 대뜸 "법무장관 말고 당신 자리를 내 놓으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산강재의 동생 일석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일석을 임명한 속뜻에는 산강재에 대한 회유가 담겨 있었다. 이는 건국초기 인재풀에서 부평삼변이 차지한 비중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산강재의 고집과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이승만의 청을 왜 거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변호달 선생과 통화내용을 정리하면서 부평삼변에 대한 글쓰기 방향이 얼추 잡혀가기 시작했다. 산강재를 중심으로 일석과 수주 3형제의 공통된 삶의 철학과 각자의 개성 있는 삶을 분리해 찾기로 했다. 이들의 삶은 세상에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대한 중복을 피하되 형제가 공통적으로 두각을 보인 반일 애국애족, 청빈낙도, 학문하는 삶을 조명할 계획이다. 특히 저서들을 꼼꼼하게 챙겨보려고 한다. 필요에 따라선 선대의 책에 대해 서평을 써보고자 한다. 학문의 깊이에 못 이겨 허우적거릴지언정 부평삼변과 교감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노자 교수 "부평삼변에 대한 좋은 저술 기원" 한쪽에선 부평삼변과 우리 집안 사이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 등을 찾아 기록할 작정이다. 신변잡기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두 집안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시대적 배경을 중시해서 담을 것이다. 아울러 부평삼변을 연구한 학자들을 통해 그들이 우리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될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는 욕심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사실 그보다는 끝맺음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다. 이 와중에 산강재 연구에 열심인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도타운 격려가 힘이 됐다. "부평삼변은 제게 당동벌이 식의 패거리주의가 난무했던 난시의 외로운 양심으로 인식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강재는 독립심이 매우 강해 그러한 역할을 모범적으로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변영태 선생이 1공 때의 국무총리직을 수락하자 산강재가 그를 만나주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을 보면 진정한 선비를 보는 것 같은 감입니다. 형제간의 정과 의리보다도 보편적인 양심을 먼저 생각하셨던 분이신 듯합니다. 부평삼변에 대한 좋은 작품을 쓰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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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14. 17:03
부평삼변과 가족사 1...
2007. 1. 14. 17:03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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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한 명을 앞세워 대표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뒤처지지 않았다. 이들은 철저히 한 시대를 풍미했고,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특히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해방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격정적으로 살다간 풍운아였다. 세 명의 천재는 그래서 부평삼변으로 불렸다. 부평삼변의 궤적을 소상히 찾기로 결심한 동기는 뜻밖에도 돌아가신 아버지(故 유석하(柳錫夏)) 때문이다. 산강재(山康齋) 변영만 선생(1889~1954, 삼변에 대한 호칭은 즐겨 쓰던 호로 통일한다)은 이철자 여사(여성의 호칭은 '여사'로 통일한다)와 사이에서 정희(丁姬)와 상수(商壽), 1남 1녀를 두었다. 선친은 정희 여사의 슬하에 4형제 중 둘째다. 따라서 산강재가 선친의 외조부다. 선친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태어난 해다. 족보상으로는 내가 세상에 나오기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생후 약 백일 후쯤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선친은 어머니와 5남매를 남겨둔 채 35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는 것 이외는 아는 것이 없다. 집안 분위기상 선친에 대한 이야기는 암묵적 합의에 의한 금기나 다름없었다. 5남매 뒷바라지에 혼이 빠진 어머니에게 선친의 기억을 되살리라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송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흘러가던 세월 속에 가둬진 금기가 어느새 호박(琥珀)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가끔 어머니의 넋두리 속에 섞여 나온 선친에 대한 기억 몇 조각만이 맴맴 맴돌 뿐이다. 좋은 기억보다는 진저리쳐지는 것들이 많았다.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찾게 된 부평삼변의 궤적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아이를 얻고 키우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몸소 느끼다 보니 자연히 선친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아이를 혼낼 때나 아이들 앞에서 처신할 때 '과연 내 아버지는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하는 자문이 늘어났다. 그것의 실체는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게다가 선친과 동갑으로 칠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금기를 깨고 서둘러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함이다. 5남매를 길러낸 어머니의 불꽃 같은 삶과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자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할머니 정희 여사의 불행한 삶을 알게 됐고, 자연히 관심 영역이 그의 아버지 산강재, 그리고 일석(逸石) 변영태, 수주(樹州) 변영로의 삶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온전한 나의 가족사인 선친과 어머니의 삶 이야기가 부평삼변으로 확대되면서 다소 부담스러웠다.
<경인일보>에서 2006년 6월에 '인천을 빛낸 인물 100인' 중 49번째로 수주를 조명하면서 옛터를 지키고 있는 변호달 선생과 인터뷰한 기사를 실은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선생은 다름 아닌 산강재의 종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할머니(변호달 선생과는 고모와 조카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부랴부랴 기사를 쓴 김아무개 기자에게 연락해 선생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물론 사전에 나의 존재와 연락하려는 이유에 대해 선생의 양해를 구한 후였다. 기쁜 마음과 달리 연락처를 받아 쥐고 난 후 다시 며칠을 생각했다. 뿌리를 알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야 모르는바 아니지만 과연 할머니의 아버지, 또 그 형제 이야기까지 담아야 하는지. 자문하고 또 자문했다. 그 사이 김 기자에게 두어 차례 전화가 왔다. 선생과 연락했는지, 또 언제 만나기로 했는지 등을 물었다. 연락을 취하지 않은 상태라고만 답했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김 기자에게는 중간에 징검다리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김 기자는 나중에 만나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성은 다르지만 명색이 혈족이고 다른 이도 아닌 부평삼변 후손들의 만남이 작은 뉴스거리가 됨직해 보인 모양이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에야 변호달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책을 엮는 데 있어서 선생에게 1차로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다. 전화를 받은 선생은 내 소개를 듣기도 전에 알아챘다. 휴대전화에 나의 이름과 번호를 입력시켜 놓은 터였다. 김 기자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그 정성에 무척 놀랐다. 따뜻하고 낭랑한 목소리에 정연한 논리로 응대한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부평삼변 이야기를 한 곳에 엮는 여정 시작 선생과 통화를 통해 나는 기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꾸는 결심을 하게 됐다. 부평삼변에 대한 후대의 기록이 없어서 후손으로서 죄스럽게 생각했는데, 책을 쓰겠다고 하니 고맙다고 했다. 부평삼변에 대해 개별적인 조명작업은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3형제의 삶을 한 곳에 모았던 작업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팽팽하게 잠겨있던 봇물이 터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구상했던 작은 가족사는 터진 봇물에 완전히 잠기고 '부평삼변'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부평삼변을 한 곳에 모아보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써왔던 기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기에 약간의 긴장감도 있다. 무엇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산강재, 일석, 수주가 곳곳에 깊게 찍어 놓은 발걸음을 좇는 흥미진진함이 나를 들뜨게 했다. 이 글을 시작으로 부평삼변을 한 권의 책으로 고이 모시는 여정이 시작됐다. 다만 그들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기도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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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스한 머리를 깐죽여 한 움큼으로 묶어내고 멀리 창밖을 바라보는 작가의 아내. 작가는 말한다. "앓고 난 아내가 머리 묶고 일어나 앉았다. 조용하다. 무얼 보시는가? 묻지 못했다."<등뒤에서, 1996> 우리 시대 대표적 판화가 이철수. 간결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주제를 담은 판화로 대중과 친숙한 이다. 1980년대 민중 판화로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고 1990년대에는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는 인본적인 주제를 선보이고 있다. <등뒤에서>는 병상을 털고 일어난 아내의 뒷모습, 작가와 그의 아내에게 주어진 각각의 삶의 무게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소탈해 보이지만 담겨진 함의가 가볍지 않다. 이번 엽서산문집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은 일상에서 작가가 느낀 가벼움과 무거움을 모두 담아 독자들에게 엽서로 띄운 것. 때론 찰나적 느낌을, 더러는 지난한 고민과 사고의 불편함을 툴툴 털어냈다. 그러는 사이 작가의 발은 전국을 떠돌고 시간은 4개의 계절을 지난다. 독자들은 오방색으로 피어나는 꽃 같은 판화와 여백을 메우는 시골된장 같은 내용의 편지를 선물 받는다. 넓고 다양한 그의 판화 이야기
"교도소 담장 안에, 정말 들어가 있어야 할 도둑놈들이 들어가 있는 걸까?"<벽>(1997) 아스라이 높고 고즈넉한 교도소 담장 바깥 쪽 풍경. 멀리 구름 한 조각 창공에 걸렸고 그 밑엔 그림자도 야박한 엉성한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여백은 시원스러운데 담장 안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혹시 안과 밖이 바뀐 것은 아닐까. 작가의 자문이 들릴 듯하다. 이철수의 판화는 공간을 채우기 보다는 비우기가 우세하다. 작가는 이를 두고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합니다"라고 표현한다. 판화라는 작업이 공간을 파고 깎아서 여백을 만들어 그 속에 주제를 담는 것. 다른 이들보다 그의 판화는 여백이 참 많은 말을 들려준다. 이번에 그것도 모자라 여백에 나뭇잎 편지까지 써내려갔으니 보이지 않는 말과 글을 합치면 책 몇 권이 나올까. 하찮은 상상도 재미있다. 다 기억 못하고 흘러가는 감정의 무늬들을 엽서산문으로 옮긴 것이 세 번째다.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2002),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2003)에 이어 세권의 나뭇잎 편지 묶음을 독자에게 보냈다. 3년간의 기다림 속에 더욱 숙성한 글과 그림이 독자 앞에 펼쳐진 셈이다. 시(詩)·서(書)·화(畵)가 공존하는 그의 판화
"당신 앞에라도 정직해 지고 싶어요. 부끄럼 없이 다 벗은 마음으로 그 앞에 서고 앉을 수 있으면 가벼워 질 듯해서. 늘 가볍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자리차지 하는 무거움이 생기면 다시 당신 앞에 와서 이야기 다 쏟아내고 싶어요, 때로 말없이도, 그럴 수 있기를……"<당신 앞에라도…> 이철수 판화의 특징은 시(詩)·서(書)·화(畵)가 한 장의 공간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또 전통과 현대, 선(禪)과 유물론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판화로 시를 쓴다'는 예술적 작위를 얻은 그다. 충북 제천 외곽 박달재고개 언저리 어디 메쯤에서 부인과 농사를 지으면서 때론 칼을 잡아 세상을 파고 더러는 책을 읽으면서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펜과 칼끝에서 전해지는 나뭇잎 편지는 결코 조용하지만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소통의 언어들이 나지막하게 가슴 밑면을 울린다. <새벽이 온다 북을 쳐라>(1988)처럼, 둥 둥 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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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4. 11:25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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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피아노 다리도 외설적이라고 여겨 덮개를 씌었던 사회적 배경을 가진 시대에도 믿어지지 않지만 '길거리 캐스팅'이 있었다. 길거리 캐스팅은 연예기획사가 말 그대로 길거리에서 미래의 스타를 발굴하는 것이다. 엄숙주의가 짓누르던 19세기 영국의 도심 네거리에서 이 같은 행위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前派) 화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 영국의 미술은 억압적인 사회구조와 맞물려있었다. 작가들은 왕립미술원의 지침에 따라 엄격한 공식과 편협한 미학규범에 얽매여 감동은 없고 기교만 충실한 작품을 양산했다. 라파엘전파는 이러한 형식주의를 탈피하고 초기 르네상스 시대(라파엘 이전의 시대)의 미학적 단순성과 도덕적 상실성을 회복하기 위해 로제티, 헌트, 밀레이 등 젊은 화가 3명이 뭉쳐서 만든 것이다. 이들은 형식주의를 피하기 위해 전문 모델이 아닌 아마추어 모델을 찾아 나섰고 왕왕 길거리 캐스팅에 나서서 목적을 달성하곤 했는데, 데브라 N. 맨코프가 쓴 <최초의 수퍼모델> 주인공 제인 모리스(1839~1914)를 이때 만난다. 제인의 모델 기용은 라파엘전파의 기존 사회 권력에 대한 반동을 대변하는 도구로 해석된다. '비범한 재능'을 가진 독특한 미인 미인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당시 미술 모델의 기준은 금발, 하얀 피부, 파란 눈 등 기본 삼박자를 갖춰야 했다. 이에 반해 제인은 피부도 눈도 검고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 윤곽이 지나치게 뚜렷했다. 이국적 아름다움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영국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제인은 19세기 라파엘전파의 거의 모든 그림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이로 인해 평범한 한 여인에게 '비범한 재능'이라는 꼬리표를 단다. 라파엘전파 삼인방 가운데 특히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1828~1882)는 열여덟 살 그녀를 모델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다. 후에 로제티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범한 재능"이라고 표현했다. 화가면서 시인이기도 했던 로제티는 그녀를 동료 시인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에게 소개시켜서 결혼에 이르게 했으며 그 후로도 10여 년간 그녀를 모델로 세웠다. 로제티에게 있어서 그녀는 중세의 여왕이나 고대의 여신이었다. 미술은 로제티가 그녀에게 구애하고 숭배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발굴한 모델을 통해 사회적 억압을 극복하려던 한 화가의 일생이 외려 한 여인에 대한 숭고한 사랑으로 얽매이는 묘한 구도를 만들었다. 제인 모리스의 삶이 비단 로제티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란 점에서 그녀는 당대의 슈퍼모델로 불릴만하다. 사람들은 로제티의 그림을 통해서만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의 스타일, 옷 입는 방식, 나른해 보이는 우아함, 정열적인 표정 등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런던의 고급상점들은 '예술적인 옷'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제인의 느슨한 옷 입기를 따라갔다. 19세기 영국 문화예술의 아이콘
버나드 쇼에 따르면 "대부분의 여자들을 망쳐놓을 만한 우대를 받으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여자"라고 평했을 만큼 실재와 그림속의 자신의 이미지를 명확히 구분한 그녀였다. 그녀는 '비범한 재능'이 특권인 동시에 부담스런 짐이며 즐겁게 누릴 수 있는 선물일 뿐 아니라 견뎌야 하는 조건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했다. 한 번쯤은 두툼한 입술에 검정 웨이브 머릿결을 가진 그녀를 마주쳤을 것이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가졌기 때문에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음직하다. 1914년 1월 28일 런던의 <타임>은 그녀의 부고기사에서 "세상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서도 압도적인 부풀어 오른 검은 머리, 상아빛 얼굴색, 절묘한 얼굴 생김새, 아름다운 손, 그리고 커다란 회색 눈을 안다"고 명성을 기념하면서 그녀가 가진 외관상 특징을 묘사했다. 최초의 길거리 캐스팅으로 명성을 얻은 슈퍼모델 제인 모리스. 당대의 미술 사조의 중심 모델로, 또 한 시대의 문화예술 아이콘으로서의 삶 속에서 그녀에게 덧입혀진 '시선의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라파엘전파 미술사조를 전공한 저자가 제시하는 전문적인 견해가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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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태로 빗대면 안데르센은 일찌감치 '왕따'였던 셈이다. 또래 친구들은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는 것과는 달리 안데르센은 인형놀이나 인형 옷 만들기를 좋아했다. 또 혼자 생각에 잠겨 있거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겨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극장을 다니면서 극작가의 꿈을 키웠다. 성인이 된 그는 갖은 고생 끝에 배우로 왕립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흥행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이 겪었던 따돌림과 가난, 그리고 재미나게 여겼던 인형놀이 등을 주제로 글을 써내려갔다.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도 1829년 그가 실제로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엮어낸 글이다. 비록 소녀는 쓸쓸이 얼어서 죽어갔지만 슬픔 속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가난을 극복한 안데르센의 마음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친구도 없이 외롭게 자라난 그가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꿈과 웃음, 때로는 진지한 고민을 던진 동화작가로 성장한 것은 단점을 장점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서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 적잖다. 보리별이 지은 <행복한 위인동화>는 몸이 약한 대신 학문으로 성군이 된 세종대왕을 비롯해 겁쟁이 테무친, 실수투성이 에디슨, 가난뱅이 카네기, 몸이 불편한 호킹, 말이 어눌한 처칠, 몸이 뚱뚱한 마이라 칼라스 등 12명의 위인들이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삶을 담았다. 훗날 광활한 대륙의 주인 칭기즈칸(왕중의 왕)이 되는 테무친이 개 때문에 겁쟁이 소리를 듣다가 가족을 위해 식량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를 극복하는 내용을 읽다보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기마민족인 몽골에서는 네 살 때 이미 홀로 말을 타고 달린다는 내용이 경이롭다. (초등학교 1~2학년용. 고현아 그림, 예림당, 147쪽, 8000원) 데스노트 같은 검정연필의 마법
수연이의 라이벌 바름이 역시 그런 엄마의 성황에 못 이겨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학습지 선생님을 맞이한다. 새로 오신 선생님은 은쟁반에 옥구슬 목소리에 연예인 외모를 가진 일명 검정연필 선생님. 어느날 선생님은 바름이에게 검정연필 한자루를 꺼내 들면서 연필 속에 컴퓨터 칩이 내장돼 있다고 속삭인다. 바름이가 시험문제의 정답을 써야만 글씨가 써진다는 다소 황당하지만 왠지 구미가 당기는 연필이었다. 이윽고 시험날, 검정연필은 학습지 선생님 말대로 틀린 답에서는 써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동안 수연이도 검정연필을 사용하고 있었다. 결과는 100점. 엄마의 입은 귀에서 귀까지 찢어졌다. 검정연필의 마법 같은 에피소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데스 노트'처럼 스스로 문제를 내고 답에 동그라미를 치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검정연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연과 바름이의 알콩달콩한 우정과 엄마들의 자화상, 그리고 우리의 교육현실을 슬며시 들춰보는 풍자를 담았다. 이 책은 오줌싸개와 별무늬 이불 속에 사는 도깨비와 우정을 그린 <이불 속에서 크르륵>, 할머니와 손녀, 그리고 이들 사이를 맺어주는 도둑고양이 이야기 <할머니를 훔쳐간 고양이> 등 단편 3편으로 엮어졌다. 아동복지학을 전공한 작가의 다채로운 소재가 재미있다. (초등학교 1~4학년. 김리리 글, 한상언 그림, 창비, 143쪽, 8500원) 읽으면 침 고이는 발효식품 이야기
바실루스 서브틸리스, 류코노스토크, 스트렙토코쿠스, 아세토박터, 페디오코쿠스, 사카로메케스….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듯한 어려운 미생물 학명이 난독증을 유발하지만 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니 한결 쉽게 눈에 들어온다. 삽화가 주는 매력이다. 이들 미생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뽐내며 다른 미생물과의 관계, 각 발효음식을 만드는 법 등을 소개한다. 가자미식해, 막걸리, 식초 만드는 공정을 보다보면 어느새 입안에 침이 한 줌 괸다. 새우젓을 소개할 때는 젓갈의 고장 강경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산 새우와 구별하는 방법까지 슬쩍 보여주는 대목에선 작가의 투철한 신토불이 정신을 엿볼 수 있어 흐뭇하다. 보태는 글에서 발효식품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옹기에 대한 소개를 빼놓지 않았다. 글을 쓴 벼릿줄은 강민경, 김란주, 김은채, 안순혜, 황복실 등 5명의 동화작가가 모여 만든 창작집단이다. (초등학교 3~4학년, 조위라 그림, 창비, 110쪽, 1만2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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