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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관 관람은 엄두도 못내던 시절. 동시상영관은 곧 자장면 곱빼기와 같은 행복한 포만감을 준다. 60~7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가이던 옥수동, 금호동 지역에는 동시상영관이 두 곳 있었다. 재래시장인 금남시장에서 응봉동 방향으로 한 블록 위 사거리에 위치한 현대극장과 금호동 로터리에 못 미처 있는 금호극장. 이들은 일명 '현장'과 '금장'으로 불렸다. 두 극장은 불과 400~500m를 거리에 두고 인접했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이 극장들은 관객 유치 경쟁 때문에 비교적 관객 입맛에 맞는 영화를 상영하는 데 조금이나마 신경을 썼다. 20여 년 전으로 필름을 감아본다. 누나와 함께 한 첫 극장구경 요즘도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를 보러 간다는 표현 중에 '극장 구경가자'란 말을 자주 쓴다. 직역하면 영화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보러가자는 의미인데 참 재미난 표현이다. 아무튼 나의 첫 극장구경은 둘째 누나와 함께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하는 첫 극장 나들이에서 본 영화는 공포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나는 누나의 손아귀를 벗어나 스크린 앞을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누나는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애국을 실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 날 이후 누나는 더는 나를 극장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한편 나의 첫 극장 구경 공식영화를 공포영화로 기억하는 이유는 관람 도중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누나가 번번히 내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또 주인공 여인이 목욕하는 뒷모습에서 나의 눈을 가린 것을 보면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나 보다. 지금도 시퍼런 달빛 아래 물을 끼얹던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질 정도니 소위 문화적 충격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곳이 바로 '현장'이었다. 본격적인 '때권시대'를 향유하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다양한 문화적, 생리적 호기심이 까까머리를 조신하게 놔두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금장' 앞을 지나야 했다. 당연히 매일 '프로'를 확인할 수 있었고 재미난 영화가 상영되는 날은 '때권' 구입을 위해 담배 가게 등을 기웃거렸다. '때권'은 '초대권'을 말하는 은어로 당시 극장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는 직원이 게시장소를 제공한 가게 주인에게 두어 장씩 공짜로 주었다. 그러면 가게 주인은 우리 같은 까까머리 학생들에게 100원 내지 150원씩 받고 팔았다. 80년대 초반 당시 '현장'과 '금장'의 관람료는 500원이었다. 가끔 가게를 하는 아버지 친구가 때권을 가지고 오면 공짜 구경하는 횡재도 누렸다. 물론 때권을 파는 가게 주인은 영화 내용과 관계없이 아무에게나 팔았고 영화관 역시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에 대해서도 무척 관대(?)했다. '비 내리는 스크린'은 아무나 하나? 싸구려 동시상영관답게 시설은 형편없었다. 좌석은 합판이 보일 정도로 비닐커버가 너덜거렸고 관내 흡연이 가능했기 때문에 공기가 탁한 것은 물론 전방은 언제나 희뿌옇게 보였다. 시멘트로 만든 검열관석이 존재했을 정도니 상당히 오래된 극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필름이 끊기지 않고 돌아 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갑자기 스크린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어대며 야유를 해댔다. 개봉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야! 필름 빨리 안 감아!" "돈 내놔! 환불해라!" 물론 육두문자가 듬뿍 섞인 외침도 곳곳에서 들린다. 그러나 그들이 야유하는 속내는 '제발 빨리 다시 보여주세요'라는 의미인 것을 왜 모를까. 씩씩거리던 관객도 필름이 다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영화에 몰두한다. 당시 영화는 이소룡이 나오는 무술영화 또는 권법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괜히 높은데서 뛰어내리고 친구들끼리 권법대결을 한판 펼치는 것은 물론이다. 요즘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당시 만해도 좌판을 목에 걸고 객석을 누비며 껌이며 과자부스러기를 팔러 다니는 판매원이 있었다.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면 관중석을 누비는 판매원 모습에서 옛날 그들의 모습이 겹친다. 동시상영에 심야극장까지… 세월이 흘러 도심에 개봉관이 늘고 영화를 즐기는 인구가 늘면서 동시상영관이 다소 위기를 맞는다. 이 때 동시상영관이 과감히 돌파구를 찾은 것이 바로 심야극장이다. 새벽녘까지 필름을 돌림으로써 필름 회전율을 높인다는 계산이었다. 때문에 한번 보고 나가야 하는 개봉관과 달리 동시상영관에는 조조부터 심야까지 죽치고 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수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심야극장이 끝난 이후 방범상 문제가 많아지면서 이 또한 여의치 않게 되자 경영난을 겪게된 동시상영관은 급격한 쇠퇴기를 맞게 된다. 헐리우드 키드가 꿈을 키운 곳 동시상영관 '현장'과 '금장'은 문화 소외지역인 옥수동, 금호동 지역에서 수십 년간 남녀노소에게 문화욕구를 해소시켜 준 명물이었다. 어느 까까머리 학생에게는 헐리우드 키드의 꿈을 심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어린 학생은 지금쯤 영화사 스태프나 유명한 감독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크린에 비가 내려도, 담배 연기로 목이 막혀도, 스크린을 가린 앞사람 뒤통수가 너무너무 미워 보인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요즘은 때권 파는 곳 없나? | ||||||||||||
2004/06/07 오후 4: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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