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상추를 씻다가 "어머" 하고 감탄사를 뱉는다. 달팽이 한 마리가 떨어질세라 상추 뒷면을 꼭 붙잡고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냉장고에서 하루를 지냈다는 대견함이다. 그는 자신이'이팽달'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5월 19일 멀리 경상도에 있는 처가 텃밭에서 출향(出鄕)한 이팽달씨는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그리고 20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발견됐다. 이 후 일주일 동안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던 차, 그의 태생과 거취가 궁금해졌다. | ▲ 사과껍질 위에서 인터뷰 중인 이팽달 씨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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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팽달씨에게 물었다. 한국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하는 일명 '호구조사'를 한 것이다. "이팽달씨는 고향이 어디십니까?" "에헴. 알면서 왜 묻소. 그러니까 경북 구미시 선산읍 이문동 댁의 처가 텃밭이라오." "어떻게 서울까지 오시게 됐는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왔소. 언젠가 한 번 오긴 오려고 했는데……." 이팽달씨는 이 부분에서 입맛을 쩝쩝 다시며 혀도 끌끌 차댔다. 혼자 오려고 작심했는데 남의 도움을 받은 것이 내심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팽달씨는 본관이 어딥니까?" "명주 이가외다." 명주 이씨, 즉 명주달팽이라고 밝힌 이팽달씨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힘의 이면에는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그럴만한 것이 명주 이씨는 우리나라 전역에 살고 있는 대표적인 달팽이이기 때문이다. | ▲ 서울 나들이가 싫지만 않다는 이팽달 씨. 그러나 그는 헤어진 부모와 형제들을 그리워 하고 있었다.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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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답이 나올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그간 서울살이에 대해 물었다. 이팽달씨는 도르르 몸을 말아 껍질로 숨었다. 지긋지긋하단 신체언어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내 몸을 쏙 빼고 눈을 껌뻑이면서 나쁘진 않다고 했다. 이유는 상추만 먹다가 오이, 사과, 양배추 등 다양한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물론 고향처럼 신선한 공기와 친환경 유기농 먹을거리는 아니지만 썩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 나들이가 쉽지 않은데 그 꿈을 빨리 이뤘다는 데 위안을 받는다고 했다. 여기서 이팽달씨는 식도락가임을 알 수 있었다. 또 원대한 꿈을 가진 달팽이란 것을 알았다. 이팽달씨의 식성은 정평이 나 있다. 각종 농작물을 닥치는 대로 먹기 유명하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점액이 말라붙어 있어 햇빛에 하얗게 반사되기 때문에 다녀갔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가족에 대해 물었다.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이팽달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고개를 떨궜다.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사과 껍질 위로 떨어졌다. "우린 암수가 한 몸이니 부모 역시 한 분이오. 한 부모님 밑에서 약 일백형제가 생겨나 가을까지 산다오." '가을까지'란 말을 할 때 이팽달씨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가을이 오기 전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이팽달씨는 인터뷰를 더 이상 못하겠다며 몸을 말아 칩거에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어깨가 한껏 처져 있었다. | ▲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이팽달 씨는 몸을 말아 칩거에 들어갔다.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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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팽달씨의 수구초심을 들은 후 양육권을 가진 우리집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팽달씨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자고. 아이들은 진짜 외가로 다시 보낼 것이냐고 되물었다. 예서 고향이란 의미는 '자연'이라고 아이들을 이해시켰다. 가까운 산 속 음지에 놓아주자는 의미라고 부연했다.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여름방학이 자신들이 직접 외가로의 귀향을 돕겠다는 것이다. 그 사이 자신들이 책임지고 키우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관심과 돌봄은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양육권을 물리적으로 뺏을 경우 야기되는 후폭풍은 '감당이 불감당'이란 것을 잘 알기에 이팽달씨에게 이렇게 전했다. "이팽달씨, 두 달 정도만 잘 버텨 봅시다. 귀거래사 부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