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8. 15:34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2006. 12. 8. 15:34 in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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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카파가 직접 쓴 2차대전 종군기다. 이 책은 1987년에 민영식씨가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란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한 적이 있어 낯설지 않다. 책 제목은 <라이프>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찍은 카파의 사진에 붙인 설명에서 비롯됐다. 사진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를 상상해 보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총알이 빗발치던 오마하해변을 떠올린다면 카파의 손 떨림은 당연한 것이다. 1944년 6월의 프랑스 오마하 해변의 물은 차가웠고 상륙정에서 내렸지만 해안까지는 100m나 남아 있는 상태. 주위로 총탄이 날아들어 물이 튀고 적의 총탄이 쫓아오는 것 같은 상황. 카파는 당시를 그렇게 적고 있다. 카파는 상륙정을 타고 노르망디 제1파 병사들 틈에 섞여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2차대전 등을 겪어 온 카파에게 전쟁은 역사적 순간이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노르망디만큼은 달랐다. 그만큼 전선이 치열했고 사선이 가까웠다. "또 다른 박격포 한 발이 날아와 철조망과 바다의 중간지점에 떨어졌다. 그 파편에 병사 한 명이 죽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찍었다.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포탄 한 발이 또 터졌다. 나는 전혀 겁먹지 않고 콘탁스 카메라 파인더에 눈을 댄 채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 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카파가 찍은 사진은 종군기자들 중 가장 훌륭한 사진으로 기록된다. 사진 현상을 하던 암실 조수 역시 흥분한 나머지 건조과정에서 너무 많은 열을 가하는 바람에 유제가 녹아 대부분 망가지는 불상사도 겪었다. 106장의 사진 중 고작 8장을 건졌는데, <라이프>는 사진에 '카파의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라는 설명을 붙였다. 스페인 내전의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으로 명성 카파를 보도사진가로 세상에 각인시킨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란 사진이다. 그해 <라이프> '올해의 표지'를 장식한 이 사진은 참호를 뛰어나온 인민전선파 한 병사가 기관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한 병사가 넓디넓은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 채, 피폐한 대지로 쓰러지기 직전의 순간을 극적으로 사진에 담았다. 이 사진의 감동은 구도나 표정, 배경이 아니다. 찰나적 긴장의 연속인 전장의 극적인 순간을 담아 낸 현장성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전쟁기록사진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게르다 역시 당시 스페인 내전에 종군하던 인민전선파 사진작가였다. 1937년 카파가 잠시 프랑스 파리에 와 있는 사이 홀로 스페인에 남아서 취재를 하던 게르다는 후퇴하던 공화파의 탱크에 치여 죽는다. 카파는 전쟁의 허망한 실상을 뼈저리게 느끼고 오랜 시간 게르다의 죽음을 슬퍼했다. 1938년 6개월간 중일전쟁을 취재한 카파는 1939년 다시 스페인 내전을 기록한다. 그리고 2차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 영국,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전선의 가장 앞에서 때론 아군보다 적진 깊숙이에서 전쟁의 역사와 상처를 오롯이 담았다. 18년간 다섯 곳의 전쟁터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에는 미 공수부대와 함께 독일에 침투, 연합군의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베를린 함락을 가장 먼저 세계에 타전했다. "만약 당신의 사진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카파이즘의 정수(精髓)다. 그는 언제나 교착된 전선이 아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단에 있었던 것이다. 카파의 이름이 쉬 잊히지 않고 이어져 오는 이유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치열한 전장에서 억압받는 이들 편에서 전쟁의 실상을 알리고자 했다는 점이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 출신 존 스타인벡은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킬 뿐"이라고 회고하는 장면에서 명성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다"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파는 1931년 좌익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조국에서 추방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데포트>라는 사진통신사 암실보조원을 하면서 자질을 인정받아 현장 취재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에 쫓겨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그는 카메라를 표현의 도구로 사용해 정치적 현실에만 초점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게르다의 죽음은 그에게 전쟁의 실상과 비인간성을 통찰하는 안목을 길러주었고 '정신'으로 사진을 찍는 카파이즘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치열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구촌은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워낙 거대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전쟁을 앞세워 기록된다. 종전과 함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카파는 <매그넘>이라는 사진배급사를 차린다. <매그넘>은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요구하는 사진을 찍어 바치는 것이 아닌 찍고 싶은 사진을 찍어 사진은행을 만들었다가 파는 에이전시다. 카파의 <매그넘>은 이전의 사진 유통체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사진작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담보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로써 보도사진 분야는 보다 개성 있고 전문성을 가진 분야로 발전했다. 다시 찾은 전장...게르다 곁으로 날아간 삶
북베트남 전장에 도착한 카파는 5월 25일 하노이 남쪽에서 프랑스 부대에 합류해 푸른 초원을 걷고 있었다. 잠시 후 셔터소리 대신 정적을 깨는 폭음이 들렸다. 카파의 카메라가 크게 흔들렸고 그와 함께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지뢰를 밟은 것이다. 이후 카파는 다시는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게르다가 있는 하늘로 날아갔다. 그이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카파는 일생 동안 약 70만 장의 사진을 남겼다. '위대한 카메라의 시인'은 카파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이 책은 카파의 자전적 전기의 일부로 2차대전에 대한 종군 기록물이다. 안타깝게도 스페인내전, 중일전쟁, 이스라엘전쟁, 인도차이나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사진작가들의 '바이블'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 책에는 사진기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는데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포착해 낸 전쟁의 실상과 그 이면의 휴머니즘. 바로 '카파이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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